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범진(李範鎭)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10518

공훈사항

이범진 경사는 1924년 12월 7일 전남 강진군 근동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전남도경 강진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강진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군경부대가 남쪽으로 후퇴함에 따라 강진경찰은 강진-해남, 강진-목포, 강진-영암, 강진-장흥을 잇는 군 주보급로 경비, 주요 시설 경비,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한강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계속 남진하자 전남경찰국은 각 서(署)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전북경찰국에 배속하고, 나머지 병력으로 전투부대를 편성했으며, 강진경찰서 병력도 전투경찰로 재편되었다.
하동의 퇴로를 차단당하여 고립된 전남 서남부지역 경찰은 7월 27일 강진부대에 이어 장흥·보성·화순부대가 완도로 철수하여 해상유격전을 전개했다. 영광 경찰병력 40명과 무안경찰서 선박부대 90명을 부산으로 보내어 후방지원을 하도록 조치하고, 강진·장흥 경찰병력은 유격전을 펼치며 적정을 수집하도록 했다.
8월 3일 강진부대 150명은 완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고금도에 상륙하여 마량포에 진출한 적의 동태를 살핀 다음 8월 5일 마량포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적 10명을 사살하였다. 경찰의 도서작전으로 인하여 적의 활동이 제한되자 적은 소도에 진출하여 완도상륙을 기도했다. 강진경찰은 완도에서 특공대 30명을 야간에 급파하여 적 3명을 사살하고 중기관총 1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9월 17일 아침 적 1개 대대병력과 지방공비 400명이 완도에 상륙을 감행했다. 경찰은 3시간에 걸쳐 적의 공격을 저지했으나 적의 우세한 화력으로 인하여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고금도의 강진부대와 신지도의 화순부대도 적의 상륙으로 인하여 철수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국군·유엔군의 총반격으로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은 가까운 산지로 들어가 공비들과 합류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공비섬멸 작전기간(1차: 1951.3.10-4.10, 2차: 1951.4.15-5.5, 3차: 1951.7.15.-8.15)을 설정하여 전국적으로 공비섬멸을 하도록 했다. 이 경사는 제1·제2차 공비섬멸작전에 참가하여 공비섬멸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경사는 며칠 후 5월 18일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강진군 도암면에 출현한 공비를 소탕하다가 공비가 쏜 총탄에 의해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범진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9-ㅈ-082)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