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범열(이범열)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19182
  • 전몰일자 : 19530222

공훈사항

이범열 중위는 출생 일자 및 장소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사 일자를 고려할 때,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정치·사회적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49년 7월 15일, 육사 9기로 입교하여 소정의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1950년 1월 14일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전남 광산의 제20연대에 배치되었다. 연대는 제5사단에 예속되어 공비토벌작전을 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기습적인 침략을 하자, 제20연대는 6월 26일 오후에 전남 송정리를 출발하여 밤늦게 미아리 방어선에 도착하였다. 이후 연대는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6월 28일에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7월 5일 제5사단이 해체될 때에 제2사단으로 예속되었다가 7월 24일 제2사단이 해체될 때에 제1사단으로 예속되어 낙동강방어선의 수암산과 유학선, 다부동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후 제20연대는 9월 25일에 경남 삼랑진의 육군 제6훈련소를 모태로 재창설되었다. 당시 이범열 중위는 제20연대 창설 요원으로 전속되었고, 연대는 제11사단에 예속되어 10월 초순에 광주지역으로 이동하여 지리산 서남쪽 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실시했다. 이후 1951년으로 접어들면서 회문산과 백아산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공비소탕작전을 실시하여 완전히 격멸했다.
제11사단은 4월 6일 호남지역 공비소탕임무를 제8사단에 인계하고, 동해안 양양으로 이동했다. 사단은 공산군 4월 공세와 공산군의 5월 공세를 대관령-강릉 선에서 저지하고, 5월 22일부터 강릉-양양 방향으로 반격하여 6월 10일에 건봉산-향로봉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후 제20연대는 수도사단이 방어하던 월비산(459고지)을 11월 17일에 인수했으나, 북한군 제9사단이 바로 다음 날인 11월 18일에 공격하여 11월 24일까지 수차례 공방전을 펼쳤다. 결국은 연대가 월비산에서 철수했다. 이후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고, 쌍방은 방어진지 보강에 힘썼다.
이범열 중위가 소속된 제20연대는 1952년 4월 15일에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동하여 경비임무를 수행하고, 7월 11일에 양양에 위치한 사단으로 다시 복귀하여 건봉산 일대의 방어지역을 담당했다. 이곳에서 장병들은 전투가 없는 상황에서 방어진지 보강과 수색작전에 집중했다. 그러던 중 그가 지휘하는 소대는 1953년 1월 중순에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매복조를 발견하여 격멸했다. 그는 소대장으로서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던 중 적의 총탄에 중상을 입고 제5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2월 22일에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범열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15묘역-1판-81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1-ㅍ-08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