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범수(李範秀)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0680924
  • 전몰일자 : 19530606

공훈사항

이범수 이등중사는 1931년 1월 22일 서울시 영등포구 상도동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분연히 일어섰다. 이 이등중사는 1952년 1월 4일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37교육보충연대에 배치되었다.
한편, 1951년 7월 10일 최초로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회담이 진행되자, 한·미는 미군 재보충이 어려운 상황과 휴전 후의 한국 국방을 고려하여 1952년 초부터 육군을 10개 사단에서 20개 사단으로 증편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4월 28일 3개의 경장비 교육보충연대(제37·38·39연대)가 창설되었고, 6월 13일 다시 같은 성격의 3개 연대(제50·51·52연대)가 창설되었다. 이 중 제37연대는 독립연대로서 철원, 김화 축선을 담당하고 있던 미 제9군단 예비로 투입되었다. 이 이등중사와 연대 장병은 교육훈련을 하면서 후방지역에 대한 수색정찰과 보급로 확보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제12사단은 11월 8일 강원도 양양에서 신편된 제53·55·56교육보충연대를 잠정 배속하여 창설되었다가, 12월 10일부로 이들 연대를 배속 해제하고, 중장비 연대로 개편 완료된 제37·51·52연대를 건제부대로 편성했다. 사단은 12월 18일 인제로 이동하여 교육훈련을 끝내고, 12월 27일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30일 미 제45사단과 임무 교대하여 강원도 양구군 서화계곡을 감제하는 812-854고지를 잇는 전선을 인수했다.
진지교대 직후 연대 정면의 북한군 제1사단은 국부적인 공격을 가해왔고 연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이를 격퇴했다. 이후 연대는 진지를 보강하면서 전투정찰, 매복작전 등을 지속했다.
적은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한편으로, 새로 투입된 중공군의 전투경험 축적과 아울러 방어선을 개선할 목적으로 6월 공세를 감행했다. 이 공세의 일환으로 사단 정면의 북한군 제3군단 예하 제45사단이 1953년 6월 1일 공격을 가해왔다. 연대는 6월 9일까지 812고지를 두고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지만 결국 이 고지를 탈환하지 못하고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이 이등중사는 소대원을 이끌고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우다 6월 6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범수 이등중사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려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66731 육)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44판-7면-05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75-ㄴ-03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