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범렬(이범렬)

  • 군별 : 육군
  • 계급 : 소위
  • 군번 : 119182
  • 전몰일자 : 19530222

공훈사항

이범렬 소위는 1929년 8월 30일에 출생했다(출생 장소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협상이 진행되던 1951년 12월 초순, 전남 광주의 육군보병학교로 입교하여 9주간의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1952년 2월 2일에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제11사단 직할부대인 수색대에 배치되었다.
이범렬 소위가 부대로 전입했던 2월 초순, 제11사단은 1월 초에 건봉산 작전지역을 제5사단에 인계하고 양양으로 이동하여 부대정비와 교육훈련에 전념하고 하고 있었다. 얼마 후 사단은 3월 30일에 제1군단에 재배속되어 다시 향로봉-건봉령-건봉산 일대의 방어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이 휴전 협상을 진행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고, 이에 장병들은 진지보강과 교육훈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소속된 수색대는 주로 적진에 침투하여 적정을 수집하여 보고하거나 적 주요시설에 대한 파괴활동을 실시했다.
이범렬 소위가 전입가기 전, 제11사단은 1951년 11월 17일에 수도사단으로부터 월비산 방어지역을 인수했으나, 북한군 제9사단은 다음날인 11월 18일에 월비산을 공격하여 탈취했다. 북한군은 지난 10월 중순에 수도사단에게 빼앗겼던 월비산을 되찾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차에 부대가 교대되는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했던 것이다. 당시 제9연대가 월비산을 담당했는데, 11월 19일에 역습으로 다시 탈취했으나 다시 빼앗겼다. 이후 뺏고 빼앗기는 고지쟁탈전이 계속되다가 11월 24일에 역부족으로 월비산을 빼앗기고 남쪽의 351고지로 철수했다. 월비산은 방어에 불리한 지형이라 더는 방어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하고 취해진 조치였다.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의 휴전협상은 포로교환 문제로 타결이 쉽지 않았고, 전선은 협상을 깨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이는 195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범렬 소위가 지휘하는 수색소대는 수시로 적진에 침투하여 적정을 수집하여 사단 정보처에 보고하고, 때로는 적 지휘소 및 보급소 등 주요시설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에 수색소대는 2월 22일에 적진에 침투하여 적정 수집을 하다가 적 부대에 발견되어 추격을 받았다. 그는 소대원들을 지휘하여 적의 추격을 따돌리며 아군 진지로 복귀하고자 했으나, 복귀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범렬 소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15묘역-1판-81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1-ㅌ-08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