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백원(李白元)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9201776
  • 전몰일자 : 19500815

공훈사항

이백원 일병은 충청북도 청원군 북일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6·25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이 소백산맥 선까지 남진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1950년 7월 15일 제1신병보충연대에 분연히 입대했다.
한편, 개전 이래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병력 보충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7월 중순 각 편성관구사령부 예하에서 무기와 장비 보충이 없는 상태에서 신편(신병 모집) 중이던 연대들을 7월 16일부로 신병교육대로 개칭했다. 그리고 이들 신병교육대를 통합할 신병훈련소 창설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1950년 7월 11일 제1훈련소의 모체가 된 제25연대(교육연대)가 대구에서 창설되어 동년 7월 17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 예하 제7교육대로 개칭되었다가, 8월 1일 육군중앙훈련소로 개칭되었다. 이는 동년 8월 14일부로 국본 일반명령 제46호에 의거 육군본부 직할로 육군 제1훈련소로 개칭(창설)되었다.
이백원 일병이 입대할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소백산맥 선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지 못하자 낙동강 선에서 최후방어전을 펼치고자 했다. 유엔군은 8월 1일부로 낙동강 선으로 철수하여 최후의 방어에 임했다. 8월 중순 전선이 왜관-수암산-유학산-군위-보현산을 잇는 대구 북방에 형성됨으로써 대구 지역에 대한 북한군 정찰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습격, 파괴활동이 더욱 극심해졌다. 당시 대구에는 정부기관, 육군본부, 미 제8군사령부 등 다양한 기관(부대)들이 밀집되어 있어 게릴라들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7월 24일 제2사단을 해체하면서 육본 직할로 대구방위사령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 사령부는 기구만 설치되었지, 실질적인 병력이 없었기에 대구 방어를 위해서는 각 도에서 집결한 경찰병력, 청년방위대, 후방병력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게릴라들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상황이 워낙 긴급했고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제1훈련소의 교관·조교, 신병들도 기동타격대에 포함되었다. 8월 15일 게릴라들이 제1훈련소를 습격했고, 이 일병과 기동타격대원들은 이들 소탕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소탕작전에서 이백원 일병은 적 게릴라들에 맞서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우다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백원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7판-4면-17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81-ㄹ-01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