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백승(이백승)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06340
  • 전몰일자 : 19510126

공훈사항

이백승 중위는 출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이 중위는 사병으로 복무하다 장교를 지망했고, 1950년 11월 15일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하여 제7사단 공병대대에 배치되었다.
이 중위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유엔군이 중공군의 제1차 공세에 밀려 청천강 일대에서 적과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다. 제7사단은 11월 14일 덕천으로 진격했고,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11월 22일 묘향산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사단은 26일 묘향산 남방에서 중공군 제38·42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사단 지휘소가 습격당해 지휘통제 능력을 상실한 채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연대는 미 제8군 철수계획에 따라 12월 3일 승호리 일대로, 6일부터 신계-시변리-연천을 거쳐 12월 15일 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했다.
38도선으로 철수한 미 제8군은 김포반도-임진강-화천-양양을 연하는 선을 주저항선으로 선정한 후 포천-김화 도로를 중심으로 중서부전선은 미군에, 동부전선은 국군에 방어임무를 부여했다. 한편 육군본부는 12월 15일을 기해 국군 제3사단의 방어 종심을 보강하고, 유사시 증원부대로 운용하기 위해 홍천에서 정비 중인 국군 제7사단을 춘천으로 이동시켜 육군 예비로 확보했다.
이후 사단은 춘천 부근의 38도선 일대에 진지를 편성하고 방어준비에 매진했다. 이 중위와 공병대대 장병들은 춘성군 오항리 일대에 투입되어 진지공사와 더불어 철조망과 지뢰 매설을 하고, 주요 교량에 대한 폭발물 설치 작업 등을 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시작했고, 사단은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사단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주진지가 돌파됨에 따라 상급부대 계획에 따라 자은리를 거쳐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북한군 제5군단이 원주 지역에 깊숙한 돌파구를 형성하고, 제2군단이 경북 안동까지 종심 깊게 침투함에 따라 사단은 또다시 철수하여 1951년 1월 8일 영월 북서방의 서벽리 일대에 배치되었다. 사단은 이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면서 일대에 침투한 북한군 제9, 제31사단 침투부대를 격멸하기 위한 수색정찰을 실시했다. 이 중위는 소대원을 이끌고 수색정찰 작전을 하던 중에 적의 기습사격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1월 26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백승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2판-2면-935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7-ㅎ-10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