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백구(李白九)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위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904

공훈사항

이백구 경위는 1907년 5월 20일 경기도 화성군 태장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경기도경 평택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성주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를 기해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평택경찰은 경계태세를 강화하며 거점방어, 주요 보급로 경비, 오열 색출, 정보수집, 철도경비, 피난민 통제·구호 임무를 수행했다.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주공부대는 7월 3일 한강을 도하하여 경부가도를 따라 남진하기 시작했고, 7월 3일에는 17대의 전차를 앞세워 경인가도로 진출했다. 7월 4일 적이 전차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남진하여 수원을 점령하자 이 경위가 포함된 경기경찰 300명이 천안-수원 간 주요 보급로 경비와 철도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군이 남으로 진격하고 전선이 남쪽으로 이동됨에 따라 이 경위가 포함된 경기경찰 300명과 재편성부대 200명이 1개 대대로 편성되어 천안전투(7.7-7.9)에 참가했다. 그러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아군 군경부대가 후퇴함에 따라 동 부대는 청주로 후퇴한 후 전열을 정비하여 청주전투(7.14-7.16)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도 중과부적으로 동 부대는 다시 상주로 후퇴하여 부대를 정비한 다음 상주전투(7.22-7.31)를 치르며 적의 남진을 저지하는데 기여했다.
북한군의 진격으로 전선이 계속 남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동 부대도 남쪽으로 후퇴를 거듭했다. 8월 4일 성주군에 도달한 동 부대는 이 지역에서 거점방어, 오열 색출, 정보수집, 철도경비, 피난민 통제·구호 임무를 수행했다. 9월에 들어서자 초조해진 북한군이 9만 명의 병력으로 왜관-다부동-영천-경주 방면에 또 한 번 대공세를 취하여 한때 대구 근교 12km 지점까지 접근하게 되었다. 이에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전하였으나, 경찰은 대구를 사수하기로 결의하여 끝까지 대구에 남아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기여했다. 9월 4일 북한군이 성주군 방면에서 대구를 향하여 공격을 했다. 이 경위는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적을 격퇴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다가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백구 경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4-ㅌ-001)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