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배홍(李培洪)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26507
  • 전몰일자 : 19501226

공훈사항

이배홍 일병은 경상남도 동래군 금성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중순,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5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하고 제6여단 제7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배홍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9월 중순, 제6사단 장병들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얼마 후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6일 오전 9시를 기해 전 전선에서 일제히 총반격작전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후방이 차단된 것도 모르고 강력히 저항하였으나, 9월 21일이 되자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제6사단 장병들은 북한군을 추격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10월 5일에는 38선을 춘천 북방에서 돌파하고, 10월 26일에는 초산을 점령한 후 압록강 변까지 도달해 국경선 경비임무에 돌입했다.
반면 중공군은 은밀히 압록강을 도하하여 적유령 산맥 일대에 숨어 있다가 10월 26일에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는 아군의 후방을 차단하면서 대대적인 공격을 실시했다. 제7연대는 27일부터 30일까지 후방이 차단된 상황에서 중공군의 대병력과 맞서며 철수를 감행했다. 이배홍 일병은 장병들과 함께 험준한 산로를 따라 130km의 원거리를 철수했다. 당시 6사단은 각 부대별로 분산 탈출하여 개천에 집결, 이후 11월 14일에 영원으로 이동하여 국군 제2군단의 예비가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 규모와 침략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기 위해 11월 24일을 기해 총공세(일명 ‘크리스마스 공세’)를 단행했다. 그러나 11월 25일 깊은 산중에 은거해 있던 중공군의 대반격으로 다시 후방이 차단되면서 후퇴를 하게 된다. 당시 이배홍 일병은 12월 초에 북창을 거쳐 시변리-고랑포 지역으로 철수하여 12월 11일에는 전곡-동두천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장병들은 방어진지를 보강하며 적 침투를 거부하기 위해 수색작전에 집중했다. 그가 소속된 소대는 12월 26일에 진지 전방지역으로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침투부대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배홍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0판-2면-12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2-ㅍ-07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