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방우(李方雨)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73899
  • 전몰일자 : 19501126

공훈사항

이방우 일병은 출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국군이 낙동강 선까지 철수하자, 그는 조국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일어섰다. 이 일병은 1950년 9월 13일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5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의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9월 공세를 맞이하여 격퇴하고 반격 중인 상황이었다. 제7사단은 영천전투〔사단(-)〕와 경주 무릉산(제3연대) 전투에서 적을 물리치고 경주에서 미 제8군 예비로 집결 중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때 사단은 미 제8군 예비에서 9월 29일 제2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었다. 사단은 추격작전 때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문경-수안보-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7일 서울에 도착했다.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연대는 김화를 거쳐 11일 평강에 진출하여 잔적을 소탕했다. 연대는 10월 17일 곡산에 도달했고, 20일 평양이 탈환되자, 21일 그 북방의 기림리, 노산리 일대까지 진출하여 육군본부 직할로 전환되었다. 23일 다시 미 제1군단 예비로 전환된 연대는 29일까지 평양과 그 북방 일대의 잔적소탕 임무를 수행했다.
10월 29일 제2군단으로 배속 전환된 사단은 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로 집결했다. 이때 중공군은 온정리, 운산 일대에서 아군을 격파하고 청천강 선까지 진출했다. 여세를 몰아 중공군 제38군은 청천강 이북의 국군과 유엔군을 포위 격멸하고 북상하는 증원부대를 차단하려 했다. 사단은 11월 2일 개천 동쪽의 비호산 일대에 배치되었다. 연대는 비호산 우측의 760고지 일대에 진지를 편성했다. 이곳에서 연대는 11월 3일부터 7일까지 중공군 제38군단과 혈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했다. 이 전투로 연대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최초로 승리하는 부대가 되었고, 이때까지 유엔군이 가지고 있었던 중공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제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사단은 11월 22일 묘향산으로 공격을 개시했으나, 중공군 제38, 42군단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일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두에서 용감히 싸우다 적탄에 맞아 11월 26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방우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유해(32묘역-1판-2401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0-ㅋ-07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