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방우(李方雨)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50928
  • 전몰일자 : 19501207

공훈사항

이방우 일병은 1928년 1월 1일에 경상북도 경주군 마동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21일, 경북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공병대대에 배치되었다. 그가 소속된 공병중대는 제7연대를 직접지원했다.
이방우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9월 하순, 제6사단 장병들은 충주와 원주를 탈환하고 홍천-춘천 방향으로 계속 공격할 준비를 했다. 이후 사단은 10월 4일에 춘천을 탈환하고, 10월 5일에 춘천 북방의 모진교에서 38도선을 돌파하였고, 김화-금성-신고산-마식령-성천-개천-희천 방향으로 계속 진격했다. 제7연대는 선두에서 10월 19일에 성천을 점령하고, 23일에 희천까지 도달했다. 이방우 일병이 소속된 공병중대는 반격 및 북진작전 간에 제7연대의 선두에서 장애물 개척 임무를 수행하여 진격 속도를 증가시켰다.
유엔군은 10월 24일에 압록강을 향한 1차 총공세(일명 추수감사절 공세)를 실시했다. 이에 제6사단은 압록강 변의 초산과 벽동 방향으로 공격하여 10월 26일에 제7연대는 초산을 점령했다. 이때 중공군은 은밀히 압록강을 건너 적유령 산맥 일대에 숨어 있다가 10월 26일에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는 국군의 후방을 차단했다. 이에 제6사단 장병들은 10월 27일부터 후방이 차단된 상황에서 포위망을 돌파해야 했다. 이방우 일병이 소속된 공병중대 장병들도 제7연대 장병들과 함께 130km의 험준한 산길을 따라 포위망을 돌파하여 10월 31일에 청천강 이남의 개천에 집결했다.
유엔군은 11월 24일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한 2차 총공세(일명 ‘크리스마스 공세’)를 실시했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 규모와 침략 의도를 모른 채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이때 중공군은 적유령 산맥 일대에 은밀히 은거하다가 11월 25일에 대반격으로 주로 국군의 후방을 차단했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후방이 차단된 상황에서 피해가 증가하자 진격을 멈추고 철수를 결심했다. 이방우 일병이 소속된 공병중대는 12월 초에 북창-시변리-고랑포 지역으로 철수했으며, 12월 7일에 고랑포 일대에서 후방에 잔류하고 있던 북한군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고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에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방우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03판-3면-21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2-ㄹ-05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