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방본(李芳本)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320179
  • 전몰일자 : 19530212

공훈사항

이방본 하사는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이 하사는 1950년 8월 하순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2269부대에 배치되었다.
이 하사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국군과 유엔군(이하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유엔군은 대구 북방의 다부동-신녕-기계-포항 일대에서 운명을 건 공방전을 계속했다. 하지만 결국 유엔군은 북한군의 8·9월 공세를 물리침으로써 국가 최대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9월 15일 시행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게 되자,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던 북한군 13개 사단의 주력은 후방이 차단되었다. 유엔군이 9월 16일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자 북한군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9월 28일 수도 서울을 수복하고 9월 말에는 38도선 일대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유엔군은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고, 20일 평양을 탈환한 후, 10월 하순에는 한·중 국경선 부근까지 북진했다. 하지만 중공군이 참전하고, 함경남도 운산과 청천강 일대에서 중공군 제1·2차 공세에서 큰 피해를 본 유엔군은 38도선으로 철수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게 되었다.
12월 31일 중공군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고, 유엔군은 ‘1·4후퇴’를 단행하여 37도선 일대로 철수하여 공산군과 대치했다. 유엔군은 이 일대에서 중공군 제4차 공세(2월 공세)를 막아내고, 공세작전을 전개하여 1951년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했다.
유엔군은 4월 초순 공세를 전개하여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한 후, 중공군 4월 공세(4. 22.~30.)와 5월 공세(5. 16.~22.)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유엔군은 적의 공세를 구파발~홍천~하진부리~강릉을 잇는 선에서 저지한 후, 공세로 전환했다. 유엔군은 5월 말에 세 번째로 38도선을 회복하고, 6월까지 공세를 지속하여 중부전선에서는 와이오밍선(연천~철원~김화)을, 중동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신 캔자스선(화천저수지~펀치볼~향로봉~간성을 잇는 선)을 확보했다.
중공군 5월 공세 후 양측은 휴전을 모색했고, 7월 10일 최초 휴전회담이 개최된 이후 지루한 회담을 이어가면서 전투 양상은 소규모 고지쟁탈전으로 변모되었다. 이러한 전투 과정에서 이 하사는 언제나 용감하게 앞장서서 싸웠으나, 1953년 2월 12일 전투정찰작전 중에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방본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07판-4면-06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8-ㅅ-04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