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발호(李發浩)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1113608
  • 전몰일자 : 19510518

공훈사항

이발호 일병은 부산시 초량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자유를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1949년 7월경 제7사단 제1연대에 입대하여 복무하다 제3연대로 전속되었다. 제3연대는 1950년 1월 25일부로 제7사단으로 예속 전환되었다가 동년 6월 15일부로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3연대는 송우리 전투, 창동 전투, 한강방어선 전투에 투입되어 적의 공격을 지연했다. 7월 5일 육군본부는 부대를 재편하여 손실이 심한 제5, 제7사단을 해체했고, 이때 연대도 해체되었다. 이후 제3연대는 민부대(민기식 부대)의 일부로서 임실-남원-운봉-함양-하동-진주로 철수하면서 지연전을 펼쳤고, 8월 1일부터는 미 제25사단에 배속되어 마산 방면에 투입되어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육군본부는 8월 20일 대구에서 제3·5·8연대와 제5포병대대를 예하부대로 하여 제7사단을 창설했다. 사단은 신령지구 전투와 영천 전투에 투입되어 적의 공세를 격퇴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의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유엔군은 9월 23일 추격으로 전환하여 북진했고, 연대는 경주-문경-충주-서울을 거쳐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했다. 연대는 김화-평강-곡산-평양 북방-개천을 거쳐 11월 초 평안남도 개천 동북방의 비호산에서 중공군과 일전을 치른 후 묘향산 남방까지 진출했으나, 중공군의 반격을 받아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고, 이후 승호리-신계-시변리-연천을 거쳐 12월 15일 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38도선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시작했고, 연대는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공격을 받고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이후 연대는 1951년 1, 2월에 영월, 평창 일대에서 중공군 제4차 공세(2월 공세)를 막아내고, 유엔군의 킬러작전(2. 21.~3. 6.)과 리퍼작전(3. 7.~3. 31.) 때는 평창군 백석산 일대에서 북한군 제27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유엔군 4월 공세 때 연대는 4월 인제 서쪽의 관대리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 4월 공세(4. 22.~30.)에 밀려 인제 서남방의 부평리, 정자리 일대까지 후퇴했다.
5월 16일 중공군 5월 공세가 시작되었고, 연대는 중공군 제79·81사단의 집중공격을 받고 5월 18일에는 풍암리까지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일병은 진지를 지키며 용감하게 싸우다 5월 18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발호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52-ㄱ-07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