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민홍(李敏洪)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1502728
  • 전몰일자 : 19510504

공훈사항

이민홍 하사는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면(現 남해읍)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광복 후 대한민국과 자유를 지키고 조국에 헌신하기 위해 1948년 2월 23일부산에 위치한 제3여단 제5연대에 현지 입대했다. 그 후 연대는 1949년 7월 10일 제3사단에서 제2사단으로 예속이 변경되어 온양으로 이동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전에 위치하고 있던 제5연대(-)는 전투준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의정부 북방의 축석령으로 투입되었으나, 전투력의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 적 전차에 의해 돌파당할 수밖에 없었다. 연대 장병들은 분산 철수하여 1950년 6월 28일 광나루에서 한강을 건넜다. 이때 이민홍 하사는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10월 초순 건강을 회복하여 제5사단 수색대로 재배치되었다. 당시 재5사단은 7월 초 국군 재편성 시에 해체되었다가 10월 8일에 대구에서 재창설되었다.
이민홍 하사가 수색대에 재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작전을 한창 진행 중에 있던 상황이었다. 제5사단은 10월 15일부터 11월 22일까지 영남 지역의 후방지역작전을 완수했다. 그러나 북진작전에 참가했던 많은 부대들이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이에 사단은 12월 5일경에 전방지역으로 투입되어 17번 국도상의 춘천에 배치하여 철수하는 부대에 대한 엄호작전을 실시했다. 이후 사단은 12월 13일부로 춘천 북방 탑두울-배후령 간에 투입되어 방어준비를 실시했다.
1951년에 접어들면서 중공군은 1월 1일 새벽에 제3차 공세(신정공세)를 개시하여 사단의 후방을 차단했으며, 1월 2일 밤에는 적이 후방으로 진출함으로써 퇴로가 이중으로 차단되어 사단은 적들에게 포위되었다. 그러나 부대원들은 포위망을 돌파하여 가평, 문막을 거쳐 제천-영월로 이동하여 방어 배치를 전환했다.
그 후 사단은 중공군 2월 공세 시 횡성 일대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적의 공격을 안흥 일대에서 저지해냈다. 3월 3일 사단은 美 제10군단에 배속되어 태기산 전투(3월), 인제 부근 전투(4월)에서 적을 격퇴하며 장평-봉화봉을 잇는 캔자스(Kansas)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으나, 중공군의 4월 공세에 밀려 다시 소양강 남단으로 철수했다.
이후 5월 초순까지 쌍방 간에 포격전만 계속되었고 전투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민홍 하사는 분대원을 진두지휘하며 홍천 북쪽 적진에 침투하여 첩보 수집 중 5월 4일 적 경계병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민홍 하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29판-4면-19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32-ㄴ-083)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