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민호(李敏鎬)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5204726
  • 전몰일자 : 19510101

공훈사항

이민호 이등중사는 경기도 옹진군 용연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조국에 헌신하고자 1949년 8월 하순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사단 제12연대에 배치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이민호 이등중사는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 이등중사가 소속된 연대는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하여 대구 고수에 큰 수훈을 세웠다. 그때부터 9월 중순까지 서로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거듭하면서 방어선을 지켜냈다.
이민호 이등중사와 연대 장병들은 파죽지세의 진격으로 9월 28일 서울탈환에 기여하고,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하였다. 조국 통일의 꿈을 안고 임진강-토산-신계-수안-상원 방향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10월 19일 평양에 최선두로 입성하는 수훈을 세웠다. 이 이등중사와 장병들이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하였던 중공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어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였다. 10월 24일 박천-운산 도로와 태천-영변 도로의 교차지점인 용산동 남쪽 1km지점에서 북한군은 전차로 증강된 대대 규모의 병력을 배치하여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다. 이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25일 아침 운산공격을 개시하였다.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한 지 닷새째인 11월 28일 연대병력은 태천 외곽까지 진출하였으나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박천 북쪽의 중막동-용산동 선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박천-용산동 일대를 고수하기 위하여 총력을 다 하였으나 계속적으로 증원부대를 투입하는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이 이등중사와 장병들은 축차적인 지연전을 펼치면서 박천 남쪽의 동이동으로 철수하였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38도선을 지켜내려 하였다. 그러나 1950년 12월 31일 시작된 중공군의 제3차 공세에는 중과부적이었다. 파평산에서 철수한 이민호 이등중사는 1951년 1월 1일 적성 부근 전투에서 적이 쏜 탄환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민호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유해(45묘역-10판-1142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13-ㄴ-00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