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민재(李旼載)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2300193
  • 전몰일자 : 19500915

공훈사항

이민재 하사는 경기도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조국에 헌신하고자 1949년 1월 12일 육군에 입대하여 국군을 건설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하였으며,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사단 제11연대에 배치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민재 하사는 미원 전투에 투입되었다. 당시 상황은 매우 험난하였다. 이 하사가 소속된 연대는 7월 13일 미원 북방에서 방어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북한군 제15사단이 괴산에서 부대정비를 마치고 16일 미명 미원 북방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부흥리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이 하사와 연대병력이 한때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북한군의 진출을 더이상 허용하지 않고 저지하였다.
이민재 하사와 연대병력은 7월 21일 춘양으로 진출하려던 중 화령장의 상황이 확대되자 보은에서 화령장으로 투입되어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이 하사를 비롯한 장병들은 8월 12일부터 다부동-군위 일대에서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다. 13일 다부동 지역에 집결한 후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연대는 신주막 일대의 계획된 진지로 진출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 제3사단이 약목 일대에서 도하하여 328고지로 공격하고 북한군 제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으로 진출 중인 연대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일부 병력을 우회시켜 미쳐 연대가 병력을 배치하지 못한 674고지를 선점하였다. 8월 15일부터 다시 총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전차 7대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복곡 일대로 물러나게 되었다.
9월 공세가 시작되자, 이민재 하사와 연대병력은 741고지-팔공산 북방 중앙선까지 담당하여 대구 북쪽의 방어진지 편성에 주력하였다. 대구 북쪽 16km에 위치한 가산(902m)은 중요한 감제 고지로서 다부동-대구간 도로와 대구까지도 감제 하는 전술적으로 중요한 고지로써 가산을 탈환하여야 하였다. 연대는 기병사단과 협조하여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주며 9월 14일에는 가산성 가장자리까지 진출하였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용감하게 북한군의 공격을 방어하던 이민재 하사는 1950년 9월 15일 팔공산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민재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1판-4면-16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11-ㅂ-08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