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민일(李敏一)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158609
  • 전몰일자 : 19520317

공훈사항

이민일 하사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도화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다시 38도선까지 철수했던 1950년 12월 중순, 경북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19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민일 하사가 부대로 전입했던 1951년 1월 하순, 제6사단은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로 동두천 북방의 방어진지에서 철수하여 장호원 부근의 적산리 일대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사단 장병들은 중공군의 2월 공세, 중공군의 4월 공세 및 5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했다. 제6사단은 용문산 일대에서 5월 24일부터 공격하여 5월 28일에 화천저수지까지, 6월 15일에는 백암산까지 진출하여 철의 삼각지대의 우측 지역인 등대리-단거리-수리봉을 연하는 선을 확보하고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즈음 유엔군은 공산군과 휴전협상을 진행하고 있었고, 이에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공산군은 1951년 가을이 되면서 휴전협상을 지연시키고 있었고, 이에 유엔군은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방어지역 전방에 대한 공세행동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도록 각 부대에 명령했다. 이에 이민일 하사가 소속된 제6사단은 유엔군의 작전방침에 의거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방어진지 전방의 주요고지를 탈취하기 위한 공세행동을 실시했다. 특히 방어진지 전방의 금성천 분지를 확보하기 위해 10월 13일부터 공격하여 정면의 중공군을 격파하고, 10월 21일에 교암산-송동리까지 진출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후 사단은 1952년이 되면서 1월 10일부로 미 제9군단에서 배속 해제되어 양구 일대로 이동하여 교육훈련을 하면서 작전지역 내에서 수색 및 매복작전을 병행했다. 이민일 하사가 소속된 소대는 1952년 3월 17일에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침투조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민일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42묘역-1판-1504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5-ㅂ-00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