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민용(李敏鎔)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10111

공훈사항

이민용 경사는 1931년 3월 28일 경기도 시흥시 동면동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철도경찰 소속으로 재직 중 여수에서 전사했다.
1949년 4월 22일 내무부 치안국은 직속으로 철도경찰본대를 두고 용산, 청량리, 인천, 개성, 대전, 곡성, 광주, 목포, 순천, 대구, 안동, 부산에 지방철도경찰대를 설치하여 운영했다. 철도경찰에게 부여된 주 임무는 철도역과 교량·연선(沿線)·터널 등 철도시설의 경계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개성 주둔 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 예하 3개 중대 병력이 분산 철수하자 개성철도경찰대 50명이 북한군을 저지하고, 경의선 개성역을 사수하기 위한 전투를 수행했다. 북한 정규군 대비 전투력의 상대적인 열세로 고립된 경찰대원들은 적진을 향해 최후 돌격을 실시했으나 탈출한 3명을 제외하고 북한군의 집중사격으로 모두 장렬하게 전사했다.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자 철도경찰대 본대는 6월 28일 서울에서 철수하여, 전선이 남으로 이동함에 따라 국군과 함께 축차적으로 수원-천안-대전-대구 등지로 이동하여 철도역과 교량·연선(沿線)·터널 등 철도시설의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9월 16일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작전을 감행함에 따라 철도경찰대도 각 지역별로 전선 상황을 고려하여 수복작전에 참여했다. 이 경사는 9월 23일 순천 철도경찰대로 복귀하여 철도역의 정상적 기능 복구, 터널 주변의 잔적 소탕과 터널 내 적이 설치한 폭발물 제거 임무를 수행했다. 1950년 11월 중순부터 태백산과 지리산을 중심으로 공비들이 준동하여 치안국은 12월 6일 태전사(태백산전투경찰사령부)와 지전사(지리산전투경찰사령부)를 창설하여 공비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지리산을 주요 근거지로 하여 전남지역 일대 준동하던 공비들은 호남의 서남부지역에도 출몰하여 주요시설 파괴와 군경부대 습격 등의 활동을 했다.
1951년 1월이 되자 지전사는 순천·구례·곡성·함양·산청지역에 제203부대와 제205부대를 투입하여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개시했는데 일부 공비들은 완도, 고흥, 여수 등지로 분산하여 공비활동을 지속했다. 1951년 1월 11일 공비들이 여수항을 통해 도주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현장에 도착한 이 경사는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공비소탕 작전을 수행하던 중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민용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3-ㅎ-023)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