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민녕(이민녕)

  • 군별 : 육군
  • 계급 : 대위
  • 군번 : 211858
  • 전몰일자 : 19521029

공훈사항

이민녕 대위는 출생 일자 및 장소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사 일자를 고려할 때, 그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지루한 휴전협상이 진행되던 1951년 1월 중순에 부산 동래에 설치된 육군종합학교로 입교하여 기본적인 군사교육을 수료한 후 김해에 설치된 공병학교로 이동하여 9주간의 공병전투기술을 연마한 후 1952년 3월 17일에 공병 소위로 임관하여 제2사단 공병대대에 배치되었다.
이민녕 대위가 부대로 전입해 왔을 때인 1951년 3월 중순에 제2사단은 안동 일대에서 후방지역작전을 하고 있었다. 이후 4월 28일에 청평으로 이동하여 미 제9군단에 배속되었다. 이곳에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하여 철원-김화를 거쳐 6월 중순에 적근산-육단리를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제2사단은 공세 행동으로 10월 13일부터 18일까지 방어진지 전방의 감제고지를 공격하여 금성천 분지를 확보했다. 이후 전선은 1952년으로 넘어가면서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이민녕 대위가 소속된 공병대대는 교량 건설 및 거부 훈련, 그리고 장애물 설치 및 개척 훈련에 중점을 두고 전기전술 연마에 집중했다. 얼마 후 제2사단은 6월 1일부로 미 제9군단에 재배속되어 6월 30일부로 김화 동쪽의 남대천 일대 주저항선에 배치되어 있던 미 제40사단의 진지를 인수했다.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공산군은 휴전협상을 지연시키며 진지 보강과 전투력 증강에 노력했다. 이에 유엔군사령관은 공산군의 전투력을 분쇄하고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각 부대에 공세적인 행동을 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제2사단은 오성산에 남쪽 남대천 부근에 솟아오른 해발 580미터의 무명능선(이하 ‘저격능선)을 공격하기로 했다. 사단은 10월 14일에 공격을 개시하여 저격능선을 탈취했으나, 다음 날 중공군의 역습으로 다시 빼앗겼다. 이후 10월 18일에 다시 공격하여 빼앗았으나 이날 중공군의 역습을 받았다. 이후 저격능선은 몇 번에 걸쳐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민녕 대위가 지휘하는 공병소대는 공격부대를 직접 지원하며 공격을 선도했다. 항상 공격작전 시에는 최전방에서 장애물을 개척하며 공격을 선도하고, 방어작전 시에는 장애물을 설치하여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10월 29일 전투에서 장애물 개척 임무를 지휘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민녕 대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97772 육)을 추서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2-ㅍ-00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