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문조(李文助)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3627
  • 전몰일자 : 19500625

공훈사항

이문조 일병은 경상북도 대구시 동인동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광복 이후 자유를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으로, 1950년 6월 중순경 육군포병학교로 입대하여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육군 직할 제1포병단에 배치되었다.
포병은 1948년 6월 26일 서울 용산에 제2포병훈련학교를, 경남 진해에 제3포병훈련학교를 설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동년 11월 20일 제2,3포병훈련학교를 해체하고 육군 잠정포병단을 설치하여 그 밑에 육군포병학교를 두었다. 포병단은 12월 15일 포병사령부로 개칭되었고, 이는 1949년 6월 20일 다시 육군포병연대로 개편되었으며, 포병연대는 10월 15일 육군포병학교로 개칭되었다.
한편, 육군포병연대 예하 제7포병대대는 8월 3일부로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 변경되었으며 수도포병대로 부대명을 개칭했다. 수도경비사령부는 6월 20일에 기갑연대, 제17연대, 독립 제1대대를 기간으로 서울시 용산에서 창설된 후 즉각 38도선 방어전투에 투입되었다. 이에 따라 수도포병대는 6·25전쟁 발발 전까지 38도선에서 북한군과 산발적인 교전에서 보병을 전투지원하면서, 전투력 배양을 위하여 교육훈련에 주력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동두천 축선에 제4사단과 40여 대의 T-34전차를 투입해 공세를 감행했다. 당시 국군은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가 없었다. 일부에서는 대전차특공대를 편성하여 육탄공격을 시도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당시 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대전차무기인 2.36인치 로켓포는 북한군의 T-34전차를 관통할 수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38도선의 대부분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육군본부는 서울방어를 위해 수도권의 부대는 물론 후방지역의 부대까지 모조리 서울 북방에 투입하도록 명령하였다. 북한군은 그날 오전 초성리를 돌파해 동두천으로 진격하였다. 이문조 일병이 소속된 수도포병대는 의정부를 거쳐 창동 방어선으로 철수하면서 화력지원을 계속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전차 공격에 밀려 국군의 방어선은 무너졌다. 이 전투에서 이문조 일병은 6월 27일 창동방어선 전투에서 적 전차를 직접조준사격으로 파괴하려다가 적 전차의 대응사격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문조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17판-6면-19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79-ㄲ-065)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