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문조(이문조)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5704875
  • 전몰일자 : 19501206

공훈사항

이문조 일병은 출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는 대한민국을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1949년 10월경 군에 입대하여 육군포병학교에서 기초군사훈련과 포병 주특기 교육을 받았다. 이 일병은 제7사단 제5포병대대로 배치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7사단은 동두천, 포천과 창동방어선, 한강방어선의 노량진, 안양 일대에서 적의 공격을 지연시켰으나, 전투력 손실이 심해 7월 5일 해체되었다. 보병사단이 재창설되면서 제1·3·5·6·7포병대대가 해체되고 제1포병단이 창설되었다. 이와 함께 제10·11·16·17·18·50포병대대가 창설되었다.
사단은 8월 20일 대구에서 제3·5·8연대와 제5포병대대를 예하부대로 하여 재창설되었다. 이때 이 일병은 제5포병대대에 다시 편성되었다. 북한군 9월 공세 때 사단은 영천전투에서 적 제15사단의 공격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이 일병은 쉴 새 없이 화력지원을 하며 적의 공격을 물리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의 마지막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때 사단은 미 제8군 예비로 경주에 집결해 있다가 9월 29일 제2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었다. 사단은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했다. 사단은 김화-평강-곡산-평양 북방-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로 집결 후, 다음 날 개천 동쪽의 비호산 일대에 배치되었다. 3일 사단은 중공군 제112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사단 장병들은 7일까지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하고 비호산을 지켜냈다. 사단이 비호산을 확보함으로써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중공군과의 대결에서 처음으로 승리함으로써 중공군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떨쳐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1월 14일 사단은 덕천으로 진격했고,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11월 22일 묘향산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사단은 묘향산 남방에서 중공군 제38·42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사단 지휘소가 습격당해 지휘통제 능력을 상실한 채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사단은 미 제8군 철수계획에 따라 12월 3일 승호리 일대로, 6일 신계를 거쳐 시변리로 철수했다. 이 일병은 철수 도중 12월 6일 적의 포격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문조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3판-40면-21876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7-ㄲ-08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