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문의(李文儀)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916

공훈사항

이문의 순경은 1925년 8월 25일 전북 임실군 삼례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전북도경 남원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함안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 순경은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기습남침을 감행하자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전북도경은 비상경비체제로 전환하고 도내 관할 경찰관서로 하여금 전투태세에 돌입하도록 했다. 남원경찰은 전주-남원, 순창-남원, 함양-남원 간 주요 도로 통제와 남원역을 중심으로 한 철도와 터널 경비에 우선을 두고 임무를 수행했다.
한강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계속 남진하자 전북경찰국은 비상경비총사령부 지시에 따라 각 서(署)의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충남지구의 지연전에 참가하도록 조치하고, 잔여 경찰병력으로 전투부대를 편성하여 북한군의 남진에 대비했다.
북한군은 7월 18일 강경을 점령하고 이어서 7월 20일 곡성을 점령했고, 그 중 일부 부대는 김제로, 일부는 전주로 남하함에 따라 전북도경은 이날 남원으로 철수했다. 7월 20일 전주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7월 21일 남원에 집결한 전북도경과 전북 북부지역 경찰은 임실 방면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에 대비하기 위해 육군부대와 합동 방어태세를 갖추고, 남원시 운봉면에 진출한 함양경찰 병력과 합세하여 육십령 고개에 차단진지를 구축했다. 육십령의 전북·경남부대의 저지선은 1개 연대규모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무너져 일부는 안의로 후퇴하고, 일부는 산복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7월 30일 진주가 포위되어 경찰 1,000여 명과 군병력 1,000여 명은 7월 31일 의령으로 철수했다. 합천으로 집결한 충남·서울·전북의 경찰병력은 일부는 고령으로, 일부는 창녕으로 낙동강 동안으로 이동했으며, 의령의 경남·전남병력은 함안-마산으로 철수하여 낙동강 방어작전에 일역을 맡게 되었다. 고령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작전에 임하고 있던 남원경찰은 8월 4일 함안으로 후퇴하여 낙동강 방어작전에 임했다. 9월 16일 국군·유엔군의 총반격작전이 개시되면서 경찰부대도 경찰지서 수복작전에 나섰다. 이날 남원경찰은 퇴각하던 북한군과 교전이 벌어졌는데, 이 순경은 적을 격멸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문의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7-ㅂ-033)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