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문우(이문우)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6502039
  • 전몰일자 : 19500817

공훈사항

이문우 하사는 1931년 12월 24일에 전라남도에서 출생했다(세부 출생 장소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조국에 헌신하기 위하여 1949년 8월 27일 입대하여, 서울 용산에 위치한 육군병참단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자대로 충원되어 병참의 양적, 질적인 향상에 전념했다.
국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서쪽의 옹진반도에 배치된 제17연대로부터 동해안의 제8사단까지 전 전선에 걸쳐 받았다. 전방의 각 사단은 적의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큰 피해를 입고 방어진지가 무너져 철수를 거듭했다. 특히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 제1, 제7사단 지역의 적의 주공방향이어서 피해가 더 컸고, 방어상태는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이에 육본에서는 수도 서울 방어를 위해 후방에 위치한 3개 사단에게 대대 및 연대 단위로 집결되는 대로 투입하도록 했다. 그리고 우선 육군본부 직할의 모든 재경부대를 동원해 전방의 제1사단과 제7사단에 배속시켜 방어력을 증강시키려 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병참단은 제7사단이 담당하고 있는 의정부 지역으로 출동했다. 제7사단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혼란에 빠져 무질서하게 철수하였고, 오전 11시경에 포천을 점령당했다. 이어 6월 26일 야간에 의정부가 함락되었다. 6월 27일 정오가 조금 지나면서 적 전차에 의해 창동방어선이 돌파되자 병력들은 소총으로 저항하며 서울 방어의 최후 저지선인 미아리고개로 후퇴했다.
병참단은 제7사단 사령부와 함께 6월 28일 새벽 2시에 한강교가 폭파된 것을 확인하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국군은 철수한 병력들을 수습하여 혼성사단을 편성하여 시흥지구전투사령부로 통합했다. 북한군이 계속 남진하자 병참단은 각 전투부대를 밀접히 지원하면서 안양-수원-평택을 거쳐 7월 5일 대전으로 이동했고, 7월 11일 김천을 거쳐 대구로 이동했다.
이후 병참단은 7월 23일 포항 백원에 보급소를 설치하여 낙동강방어선의 전방 부대들을 적시적으로 지원했다. 이문우 하사가 소속된 제2병참보급중대는 8월 17일 전방부대 지원을 위해 이동 준비하는 중에 적 게릴라의 습격을 받아 적들을 격퇴함으로써 막대한 군수품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이문우 하사는 분대원들을 진두지휘하며 게릴라와 교전중 적의 기습사격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문우 하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33판-40면-21874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3-ㅇ-015)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