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문우(李文佑)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6522631
  • 전몰일자 : 19500807

공훈사항

이문우 일병은 전라남도 광양군(現 광양시) 광양읍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자유를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1950년 2월 초순경 육군에 입대하여 서울특별시 용산에 위치한 육군병참단으로 배치되었다.
육군병참단은 1949년 8월 1일 제1병참대대의 조직을 확장하여 편성되었다. 이문우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당시는 38도선 일대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잦았던 시기로서 병참 분야는 美軍 지원에 의존하는 초보적인 단계였다. 모든 것이 미비한 상황에서도 그는 최선을 다해 복무함으로써 병참의 양적, 질적인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6·25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은 동두천, 포천 축선에 주공인 제1군단의 주력을 투입했다. 북한군은 동두천 축선에 제4사단과 제203전차연대 1개 대대를, 포천 축선에 제3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투입했다. 제7사단은 북한군의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 무기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병력면에서는 7배, 화력면에서는 18배나 우세한 적과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절대적인 전력의 열세 속에서 1950년 6월 25일 포천이 적에게 함락되고, 6월 26일에는 의정부마저 함락되게 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부족한 병력과 장비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했다. 육군본부는 본부 직할의 모든 재경부대를 동원해 전방의 제7사단에 배속시켜 방어력을 증강했다. 그리고 6월 26일 저녁에는 육본 교도연대를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시켜 창동 지역에 배치했다.
이문우 일병과 일부 병참단 병력들은 육본 교도연대에 편성되어 창동 일대에 투입되었으나, 빈약한 장비와 탄약으로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6월 27일 북한군이 전차를 앞세워 창동 방어선에 돌입하자 전차를 파괴할 수 없는 국군은 한강 이남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병참단은 안양-수원-평택을 거쳐 7월 5일 충청남도 대전으로 이동했고, 전세가 악화됨에 따라 7월 11일 김천을 거쳐 대구로 이동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지연전을 실시하여 8월부터는 낙동강방어선에서 적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이문우 일병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전방 부대들을 밀접히 지원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8월 초순경 낙동강방어선의 전방 사단에 대한 보급 추진 중 적과 조우하여 교전하다가 중상을 입고 대구에 위치한 제2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증상이 악화되어 8월 7일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문우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33판-40면-21874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0-ㅇ-100)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