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문우(이문우)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217063
  • 전몰일자 : 19500925

공훈사항

이문우 일병은 경상북도 경주군 위전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중순,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훈련소에 잔류하여 조교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한 이래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병력 보충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병력 확보와 각 지역방위 임무를 동시에 해결할 목적으로 7월 초순, 각 도에 편성관구사령부를 설치하고 신병 확보와 더불어 후방지역작전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가 대구에서 창설되었다. 그리고 신병교육을 위해 7월 11일에 제25교육연대가 창설되었으며, 8월 1일에 육군중앙훈련소로 개칭되었다가, 8월 14일에 육군본부 직할로서 육군 제1훈련소로 재창설되었다. 같은 날, 육군본부 직할로서 경남 부산에 제2훈련소가 설치되었다.
이문우 일병이 육군 제2훈련소에 배치되었던 8월 하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8월 공세를 맞이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훈련소는 창설 직후로서 신병교육과 적 게릴라 소탕작전에 여념이 없었다. 당시 부산 지역은 유엔군의 병력과 물자가 증원되는 항구이며, 임시 수도가 위치한 곳으로 아군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반면 적 게릴라들에게는 후방을 교란할 수 있는 공격목표들이 많이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으로 전환한 후에는 미처 도주하지 못한 패잔병들이 유엔군의 주요 병참선을 통제할 수 있는 주변 고지에 위치하며 후방교란 활동을 계속했다.
당시 상황이 긴급했고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육군 제2훈련소는 신병훈련에 주력하면서도 동시에 인근에 출몰한 적들의 유격활동에 대응해야 했다. 훈련소는 조교를 포함한 기간요원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이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해 왔다. 그러던 중 9월 25일 밀양 일대에 적 게릴라가 출몰했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이문우 일병이 소속된 기동타격대는 즉각 출동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들의 기습사격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문우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06판-2면-09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2-ㅇ-04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