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문백(이문백)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9712247
  • 전몰일자 : 19501104

공훈사항

이문백 일병은 출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국군이 북한군에 밀려 소백산맥 선으로 후퇴하자, 그는 1950년 7월 중순 제1교육대에 입대했다. 제1교육대는 전북지역에서 신병모집을 하던 제3연대를 7월 16일부로 개칭한 부대였다.
8월 20일 제7사단이 제3·5·8연대와 제5포병대대, 공병대대 등을 주요 예하부대로 하여 재창설되었다. 이때 이 일병은 사단 수색중대에 배치되었다. 9월 5일 북한군 제15사단은 영천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제7사단은 9월 8일 제2군단에 배속되어 영천 전투에 투입되었다. 9월 10일 제8사단에 배속되었던 제5·8연대와 제3연대 1대대가 사단으로 원복했다. 이날 반격을 시작한 사단은 당일 영천을 탈환하고, 12일 관산과 영천-안강 간 도로를 확보했으며, 13일에는 기계-안강 방면의 적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무학산과 384고지를 점령 후, 기계 방면으로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격멸했다. 사단은 영천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의 최대 위기를 극복하고 조국을 지켜내는 데 크게 기여했고, 대통령 부대표창도 받았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때 사단은 미 제8군 예비로 경주에 집결해 있다가 9월 29일 제2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었다. 사단은 추격작전 때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문경-수안보-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7일 서울 청량리에 도착했다.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사단은 김화를 거쳐 11일 평강에 진출하여 잔적소탕을 한 후에 계속 진격하여 17일 곡산에 도달하여 잔적소탕작전을 했다. 20일 평양이 탈환되자, 사단은 21일 평양 북방의 기림리, 노산리 일대까지 진출하여 육군본부 직할로 전환되었다. 사단은 29일까지 평양과 그 북방 일대의 잔적소탕 임무를 수행했다.
10월 29일 제2군단으로 배속 전환된 사단은 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로 집결했다. 11월 3일 사단은 중공군 제112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사단 장병들은 7일까지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하고 비호산을 지켜냈다. 사단이 비호산을 확보함으로써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전투에서 수색중대는 사단 측방 방호 임무를 수행했다. 이 일병은 수색병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우다 11월 4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문백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3판-40면-21863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7-ㅊ-05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