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문동(이문동)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9702550
  • 전몰일자 : 19501009

공훈사항

이문동 일병은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선까지 후퇴하는 조국의 위기상황을 보면서 군 입대를 결심하고, 1950년 8월 중순 대구에 위치한 경남편성관구사령부 내 제7교육대(이후 육군 제1훈련소로 개칭)로 입대하여 단기간의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동 훈련소의 조교 요원으로 배치되었다(출생 일자 및 출생지 미상).
육군본부는 개전 이래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병력 보충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자, 7월 초순에 각 도별로 편성관구사령부를 설치하여 신병 확보와 더불어 후방지역작전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가 대구에서 창설되었고, 신병교육을 위해 7월 11일에 제25교육연대가 창설되었다. 이는 7월 17일에 경북편성관구사령부 제7교육대로 개칭되었고, 8월 1일에 육군중앙훈련소로 개칭되었다가, 8월 14일 국본 일반명령 제46호로 육군본부 직할로서 대구에 육군 제1훈련소로 재창설되었다.
이문동 일병이 육군 훈련소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 9월 공세를 맞이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편, 대구 지역은 반란사건이 일어나는 등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활동이 심했던 지역이었다. 유엔군이 반격으로 전환한 후에는 미처 도주하지 못한 패잔병들이 대구 인근의 팔공산이나 보현산 등을 근거지로 하여 이들 빨치산들과 연계하여 후방교란활동을 계속했다. 대구에는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 각종 지원부대, 정부기관 등이 밀집되어 있어 게릴라들의 좋은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이 긴급했고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육군 훈련소는 신병훈련에 주력하면서도 동시에 인근에 출몰한 적들의 유격활동에 대응해야 했다. 훈련소는 조교를 포함한 기간요원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이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해왔다. 10월 9일 대구 남방의 청룡산에 적이 출몰했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이 일병이 소속된 기동타격대원들은 이들 소탕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소탕작전에서 이문동 일병은 적들을 포착하여 포위망을 좁혀가던 중, 적들의 기습사격에 맞아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문동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3판-40면-21862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23-ㅎ-07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