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문동(이문동)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1132055
  • 전몰일자 : 19510511

공훈사항

이문동 일병은 경상남도 통영군 거제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자 1949년 11월 중순 제1여단 제1연대에 현지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예하부대로 배치되었다. 제1여단은 1949년 2월 1일 수도여단으로, 5월 12일 수도사단으로, 6월 10일 제7사단으로 개칭되어 동두천, 포천 축선의 38도선 방어임무에 투입되었다.
제7사단은 적의 주공방향으로 판단된 의정부 축선의 양주군 적성에서 사직리까지 47km 정면의 38도선 방어를 담당했다. 1949년 말경부터 북한의 남침징후가 높아짐에 따라 육군본부는 경계강화 지시를 수차례에 걸쳐 거듭 하달했고, 이문동 일병과 제1연대 병력은 진지공사와 훈련, 경계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문동 일병이 소속된 제1연대는 전투에 투입되어 철수와 방어로 이어진 수세적인 전투를 전개하며 동두천을 탈환하고 소요산까지 진출하기도 하였으나 곧 이은 북한군의 대규모 반격으로 의정부방면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일병은 의정부-창동-미아리 방어선에서 육탄공격까지 감행하면서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전투력의 열세로 인해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게 내어주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후 1950년 6월 28일부터 한강선 방어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후 연대는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지연전을 실시하고 7월부터 낙동강선 방어 작전에 돌입하여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한 후 북진작전에 돌입함으로써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계속해 한・만 국경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1950년 10월 25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제천-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철수하였으나, 제2차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38선 부근까지 진격하였다.
연대는 1951년 휴전회담이 진행되기 직전까지 중공군과 몇 차례의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전선이 교착상태에 접어들자, 양측은 주요 고지를 놓고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전개하였다. 이문동 일병이 전투를 수행하는 고지에서는 서로 뺏고 빼앗기는 전투가 반복되면서 5월 11일 중공군 공격에 따라 방어 중 적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문동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126-ㅍ-01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