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문기(李文琪)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위
  • 군번 :
  • 전몰일자 : 19520803

공훈사항

이문기 경위는 1920년 5월 3일 전북 정읍 북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충남도경 금산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진안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4일 한강 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진하자 금산경찰은 주요 시설 경비, 금산-대전, 금산-옥천을 잇는 주요 보급로 경비,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충남경찰은 군의 요청에 의거 경부선의 주보급로 경비를 맡아 7월 1일부터 충남 직속대대 100명으로 대전-영동 간의 철도경비를 하는 한편 100명을 옥천과 대전 외곽에, 100명을 금강과 신탄진에 배치하여 경계작전을 수행하도록 했다. 이때 이 경위는 대전 외곽에 배치되어 경계작전을 수행했다.
충남경찰은 7월 11일 제1대대(충남·서울경찰)를 청양, 제2대대(충남·경기경찰)를 홍산에 배치하여 청양-대천 선에서 군과 함께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경위가 속한 제1대대는 예산 방면에서 남진 중인 적 유격대를 급습하여 20명을 생포했고, 홍성군 산성면에서는 적과 교전하여 50명의 포로를 획득하고 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7월 12일 공주를 점령한 북한군 제4사단이 일부 병력을 강경·논산으로 우회시켜 대전 점령을 기도했다. 7월 15일 제1대대장은 제1중대 130명을 직접 지휘하여 대천 방향으로 진격하여 집결해 있는 수십 명의 북한군을 포위 급습하여 사살 3명, 포로 2명, 지방 공비 4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북한군이 계속해서 남진함에 따라 금산경찰은 무주-거창-창녕을 거쳐 8월 4일 함안에 도달했으며,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기까지 낙동강 방어작전에 참여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국군·유엔군의 반격작전이 개시되자 금산경찰은 10월 10일 금산경찰서를 수복하고 지역 내 치안유지활동을 강화하는 한편 지역 내 잔적소탕작전을 전개했다.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공비섬멸 작전기간(1차: 1951.3.10-4.10, 2차: 1951.4.15-5.5, 3차: 1951.7.15.-8.15)을 설정하여 전국적으로 공비섬멸작전을 시행토록 했다. 이 경위는 제1-제3차 공비섬멸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1952년 8월 3일 전북 진안군 정천읍 장안면에 공비들이 출현하자 무주·진안·장수·금산경찰이 출동했다. 이 경위는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공비 3명을 사살하고 계속 작전을 수행하던 중 공비가 쏜 총탄에 의해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문기 경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05묘역-3판-16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으며,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5-ㄴ-079)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