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문규(이문규)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9713249
  • 전몰일자 : 19510510

공훈사항

이문규 이등중사는 출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일어섰다. 이 이등중사는 1950년 7월 17일 제1교육대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통신중대에 배치되었다.
제7사단은 8월 20일 대구에서 제3·5·8연대를 예하부대로 하여 재창설되었다. 제7사단은 8월 20일 제3·5·8연대를 예하부대로 하여 재창설되었다. 사단은 낙동강방어선의 영천전투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을 격멸함으로써 조국의 위기를 구해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했다. 사단은 김화-평강-곡산-평양 북방-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로 집결 후, 다음 날 개천 동쪽의 비호산 일대에 배치되었다.
사단은 11월 초순 평안남도 개천 동북방의 비호산전투에서 중공군을 격퇴했다. 사단은 11월 22일 묘향산을 공격했으나, 중공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이후 사단은 승호리-신계-시변리-연천-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12월 15일 춘천 동북방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시작했고, 사단은 적의 공격에 밀려 횡성 북방을 거쳐 1951년 1월 8일 영월 북서방의 서벽리 일대에 배치되었다. 미 무렵 북한군 제2군단이 영월로 진출했고, 사단은 1월 19일부터 24일까지 치열한 교전 끝에 영월을 탈환하고 적을 섬멸했다. 중공군은 2월 11일 횡성-원주 축선에 전투력을 집중하여 제4차 공세(2월 공세)를 개시했다. 횡성 동북방의 창동리에 배치되었던 사단 장병들은 분전하다 평창 일대까지 밀려났으나, 영월에서 17~18일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유엔군의 킬러작전(2. 21.~3. 6.)과 리퍼작전(3. 7.~3. 31.) 때 사단은 평창군 일대에서 북한군 제27사단과 공방전을 벌인 끝에, 3월 하순 인제군 현리 일대까지 진격했다.
4월 초 국군과 유엔군은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사단은 4월 중순 인제 서쪽의 관대리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 4월 공세(4. 22.~30.)에 밀려 인제 서남방 소양강 변의 정자리 일대까지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이등중사는 지휘통신을 유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5월 10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문규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118-ㅂ-01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