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문구(李文九)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713863
  • 전몰일자 : 19510420

공훈사항

이문구 일병은 1934년 4월 25일 서울시 성동구 하왕십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인해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1년 2월 1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수도사단에 배치되었다.
이문구 일병이 전선에 투입될 당시 사단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맞아 1951년 2월 3일 강릉 방향으로 위력수색을 하던 중 임계 일대에서 적 유격부대를 발견하고 야간에 포위망을 압축한 후 기습공격을 감행해 수백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세웠다. 이어 4일~7일 사단은 강릉 동남쪽 7㎞ 전방까지 진출한 후 북한군의 측방을 공격해 들어갔다. 이때 이 일병과 사단 일부 병력은 퇴각하는 북한군을 추격해 소탕하고 강릉을 점령하였다.
이문구 일병과 장병들은 강릉에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2월 25일부터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속사리 부근으로 투입되었다. 그러나 5일간이나 계속된 폭설로 인하여 대관령-횡계리-구산리 간의 도로가 차단됨으로써 공격이 지연되었고, 제설작업 끝에 3월 1일에 이르러서야 경강국도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 1개 대대를 투입 2개 대대 병진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일병과 장병들은 3월 9일 속사리 일대 북한군 지역을 위력 수색해 북한군을 멀리 구축하였고 3월 26일 제2차로 38도선을 돌파한 후 계속 진격하여 4월 15일에는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으로 임진강과 화천저수지를 끼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선)의 동단 남가리로 진출하였다.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무수한 인명이 희생되는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그는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켜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투에 임했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사력을 다해 분전하던 이문구 일병은 1951년 4월 20일 남기리 부근 전투에서 북한군의 기습사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문구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26판-4면-24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4-ㅌ-07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