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무재(李武載)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9236664
  • 전몰일자 : 19530726

공훈사항

이무재 하사는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現 구미시 고아읍)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협상이 지속되면서 고지쟁탈전이 진행되던 1952년 9월 초순경 입대하여,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1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육군직할 제8820부대로 배치되었다.
(*전사자 명부에 제8820부대는 고유명칭 확인이 불가능하므로 입대부터 전사 당시까지 6·25전쟁의 전반적인 경과 위주로 기술)
이무재 하사가 부대에 배치될 당시 전황은 1952년 여름부터 공격작전을 진행한 북한군이 가을에 접어들어 전 전선에서 작전의 주도권을 잡고 아군 전초진지에 대하여 선제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 일환으로 중부전선의 백마고지에 대한 공격도 실시했다.
그러나 휴전회담이 여전히 중단된 상황에서 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피아는 1952년 말까지 계속된 치열한 고지쟁탈전과 전선정비를 하면서 휴전회담의 최대 걸림돌인 포로문제의 조기타결을 목표로 하되 자신들의 입장 관철을 위한 영향력의 행사하려고 했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휴전과 관련하여 보다 양호한 방어선의 확보, 그리고 정치, 심리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전쟁의 종결 등 군사. 정치적 목적에서 새로운 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군사전략의 모색에 분분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1953년 1∽2월에는 전력증강과 진지공사에 주력하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3월이 되자 공산군은 작전에 양호한 기후조건을 이용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전초진지에 대하여 제한된 규모이지만 집중적인 공격을 시행했다. 그 후 중단된 휴전협상의 본회담이 4월 20일부터 시작한 상병 포로교환이 계기가 되어 4월 26일에 6개월 만에 재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군은 5월부터 하계공세, 즉 휴전 전 ‘최후의 공세’라 칭하는 대공세를 취했다.
이무재 하사가 전투를 수행하는 고지에서는 서로 뺏고 빼앗기는 전투가 반복되면서 적과 아군의 시체가 쌓여갔다. 이무재 하사는 중공군의 7월 공세에 따른 방어 작전 시 강원도 김화 일대 교암산 부근 전투에서 1953년 7월 11일 적과 교전 중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서울에 위치한 제36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7월 26일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무재 하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89-ㅊ-030)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