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무성(이무성)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207969
  • 전몰일자 : 19510314

공훈사항

이무성 일병은 출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국군이 낙동강 선까지 철수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이 일병은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그는 1950년 9월 8일 부산에 있는 제2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3사단 제22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북한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제3사단은 동해안 축선의 흥해 일대에서 북한군 제5사단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연대는 9월 14일까지 흥해, 포항, 형산강 일대에서 북한군 제5사단과 공방전 끝에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총반격태세에 들어갔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국군은 9월 16일 총반격작전으로, 9월 22일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 일병과 연대 장병들은 평해-울진-삼척-강릉으로 일일 평균 17.3km의 속도로 진격했다. 연대는 10월 2일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했다. 연대는 10일 원산을 확보한 후 잔적을 소탕했다.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이 연대의 임무를 인수함에 따라 연대는 길주-백암-혜산진으로 북진하여 30일 선두부대가 한·중 국경선의 혜산진에 도달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연대는 12월 10일 흥남에서 해상철수를 개시하여 구룡포에 상륙했다.
제3사단은 12월 20일경 홍천으로 이동하여 소양강 변의 관대리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중공군은 12월 31일 전 전선에 걸쳐 제3차 공세를 감행했고, 연대 장병들은 북한군 제10사단을 맞아 분전하다 진지가 돌파당하자 평창으로 철수했다. 연대는 1951년 1월 15일부터 19일까지 영주 남대리 부근으로 침투한 북한군 제31사단을 격멸했다. 2월 11일 중공군은 제4차 공세(2월 공세)를 감행했다. 이때 연대는 횡성의 섬강 일대에서 중공군 제197사단과 혈전을 벌였다. 연대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적의 집중공격으로 진지가 돌파당하자 12일 원주로 철수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공세로 전환하여 3월 7일부터 31일까지 리퍼작전을 전개했다. 이때 연대는 제3군단에 배속되어 평창군 하진부리, 유천리 일대를 점령하고 계속 공격하여 3월 말 38도선 상의 현리-하림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이 일병은 선두에서 용감하게 전진하다 3월 14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무성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40면-21855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3-ㅇ-03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