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몽치(李夢致)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4327
  • 전몰일자 : 19510904

공훈사항

이몽치 일병은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했던 1950년 12월 중순,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5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2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몽치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1951년 1월 중순, 제6사단은 1950년 12월 31일에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로 동두천 북방의 방어진지에서 철수하여 장호원 부근의 적산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이후 유엔군은 중공군의 2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다시 서울을 탈환하고 38도선을 회복했다. 당시 제6사단은 반격으로 사창리까지 진격했으나, 이때 중공군의 4월 공세로 4월 말에는 용문산 일대로 철수하여 추후 예상되는 중공군 공격에 대비하여 방어진지를 강화했다. 사단은 제7·제19연대를 용문산 주방어진에 배치하고, 제2연대는 홍천강 남쪽에 추진하여 전초진지로 운용하였다.
이몽치 일병이 소속된 제2연대는 5월 16일 중공군의 5월 공세가 시작되자, 강력히 저항하며 전면방어로 끝까지 사수하여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용문산 방어진지에 있던 제7, 제19연대가 5월 20일부터 신속히 반격하자, 적들은 당황하여 황급히 물러갔다. 제2연대는 5월 24일부터 계관산-북배산을 점령한 뒤, 26일에 춘천 동북방으로 진출하여 28일 화천저수지까지 진출했다.
제6사단은 6월 6일부터 공격하여 10일에는 최종목표인 취봉(987고지)을 점령했다. 이후 제7, 제19연대를 당거리-782고지-1057고지에 배치하고, 제2연대는 백암산 남쪽 기슭에 배치했다. 그러던 중 소련의 유엔 대표 말리크가 6월 23일에 휴전을 제안하고 유엔군도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전선에서는 전투가 사라지고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제6사단은 8월 31일에 유엔군의 작전지침에 의거 주저항선 전방의 감제고지에 대해 제한된 공격작전을 실시했다. 이날 이몽치 일병이 소속된 제2연대는 백암산 전방에 위치한 등대리 부근의 819고지-462고지를 목표로 공격했지만,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9월 1일까지도 점령하지 못했다. 이에 연대는 9월 2일부터 현재 점령한 진지를 보강하는 한편 수색작전 활동을 강화했다. 그가 소속된 소대는 9월 4일 방어진지 전방지역에 대한 수색작전 중 적 침투부대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에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몽치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8판-3면-06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4-ㅇ-03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