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몽용(李夢龍)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37322
  • 전몰일자 : 19510203

공훈사항

이몽용 일병은 전라북도 익산군 성당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격렬한 공세를 힘겹게 저지하던 시기인 1950년 9월 초순 제주에 설치된 육군 제5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사단 제11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몽용 일병이 배치된 낙동강 방어선에서는 혈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9월 15일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낙동강 일대의 북한군 주력은 후방이 차단되었다. 이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파죽지세의 진격으로 9월 28일 서울탈환에 기여하고, 10월 19일에는 평양에 선두로 입성하는 수훈을 세웠다. 이어 청천강 남쪽의 신안주 부근에서 재정비를 완료한 사단은 11월 20일 태천-구성-삭주-신의주로 진출하게 되었다. 북한군은 27일을 전후하여 연대가 방어 중인 대령강 동쪽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맞선 이 일병과 연대 장병들은 태천 동남쪽의 학봉동, 기우산, 토라산 일대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격전을 펼쳤으나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일병과 연대병력은 12월 7일 사리원에서 남천으로 이동하여 구월산 일대에서 패잔병을 소탕하였다. 이후 위천리, 구화리 일대의 축차적인 지연 진지를 점령하여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지역 내 패잔병 소탕작전을 실시하고 철수가 완료되자 14일에는 고량포-적성 일대에 배치되어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이로써 6개월 만에 전쟁 개시 이전의 진지를 다시 점령하게 되었다. 연대는 방어진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지뢰와 철조망을 가설하는 동안 수색대를 강북으로 파견하여 적정을 탐지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몽용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면서 1951년 1월 4일 서울에서 37도선 평택까지 철수하였다. 이 일병과 장병들은 신정 공세 이후 계속된 철수 작전으로 사기가 저하되고 지연전을 펼치며 고갈된 피해를 회복하고 부대정비를 거쳐 2월에 총공세로 전환하였다.
이 일병은 일부 병력과 정찰 도중 북한군 정찰대와 마주치게 되어 쌍방 간에 수 시간 동안 총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몽용 일병은 적의 총탄을 피하지 못하고 1951년 2월 3일 수원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몽용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013-ㄹ-02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