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훈(李命勳)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08702
  • 전몰일자 : 19520118

공훈사항

이명훈 중위는 1930년 9월 24일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6·25전쟁 발발하고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1년 2월 중순에 전남 광주에 위치한 육군보병학교로 입교하여 단기간의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5월 초순경에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육본 직할부대에 배치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이명훈 중위는 낙동강선 방어작전에 참가하였다. 이 중위와 장병들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전투를 수행하면서 축차적으로 지연작전을 실시하여 1950년 7월부터는 낙동강선 방어 작전에 돌입하였다. 이후 1950년 10월 25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제천-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철수하였으나, 제2차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38선 부근까지 진격하였다. 이후 몇 차례의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중위와 연대 장병들은 중공군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 38도선 이남으로 다시 철수하게 되었으며, 1951년 휴전회담이 진행되기 직전까지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과 몇 차례의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휴전회담의 속개와 더불어 전선이 교착상태에 접어들자, 양측은 주요 고지를 놓고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전개하였다. 이명훈 중위가 전투를 수행하는 고지에서는 서로 뺏고 빼앗기는 전투가 반복되면서 북한군과 아군의 시체가 쌓여갔다. 1951년 말 전선의 양상은 장기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고 때때로 공격행동을 취할 때는 다만 전초진지 주위의 주요고지를 목표로 쟁탈전이 전개되곤 하였다. 대부분 전선에서는 연대급 이하의 전초진지 쟁탈이 반복된 소부대전투의 연속이었으며 거의 소강상태였다.
1952년에 접어들어 국군과 유엔군은 휴전회담의 진전에 따라 수도 서울의 방위에 역점을 둔 군사적 보완책으로 전 전선에 걸쳐 부대를 재배치하는 한편 부대의 인원, 장비의 개편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명훈 중위와 장병들은 북한군의 기습에 대비하여 야간정찰과 진지 보강작업에 주력하였다.
이명훈 중위는 소대장으로서 모든 작전에 솔선수범하며 앞장섰다. 그는 이 작전에서도 소대원을 이끌고 주보급로 경계 임무를 수행하다 적 게릴라들의 기습사격을 받고 1952년 1월 18일 영천 부근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훈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47판-7면-17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087-ㅎ-03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