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화(李命和)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63289
  • 전몰일자 : 19501222

공훈사항

이명화 일병은 경상남도 사천군 사천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6월 29일 육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간단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수도사단에 배치되었다.
이명화 일병이 전선에 배치될 당시 수도사단은 제1연대와 제18연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사단은 미군이 방어하고 있던 금강선과 대평리 선이 위태롭고 또 청주 국사봉 방어선이 언제 돌파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7월 17일 보은을 거쳐 20일 안동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북한군 제12사단이 안동 북쪽에서 계속 공격해 오자, 이 일병과 장병들은 8월 1일 안동 북쪽 일대에서 국군 제8사단을 엄호하면서 낙동강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이명화 일병과 장병들은 8월 3일 길안과 청송 일대에 새방어선을 설정해 이곳으로 철수하였다. 그때 그는 진지 후방으로 침투한 북한군과 치열하게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의성 일대로 다시 철수하였다.
북한군 제12사단은 8월 9-12일 사이에 청송-죽장-기계 축선으로 공격하여 기계와 포항을 점령하였다. 이 일병과 일부 병력은 16일 안강 북쪽 양동리 지역으로 투입되어 북한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사력을 다해 기계를 탈환하였다.
그는 북한군의 9월 공세의 일환으로 적 제12사단이 비학산 일대에서 공격해 오자, 9월 4일 안강을 포기하고 경주 북방에 있는 낙산(호명리)으로 철수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그와 연대병력은 9월 말 양양까지 진격하면서 38도선을 회복하였다. 이어 10월 1일 하조대 부근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하였다. 그는 10월 10일 원산을 탈환한 후 함경북도 길주까지 진격하였다. 12월에 접어들어 이 일병과 연대병력은 북한지역을 포기하고 철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후방지역이 중공군에 의해 차단되면서 해상 철수를 위해 흥남에 집결하였다.
이 일병은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전투 경험이 많지 않은 신병에 불과하였으나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신념만큼은 누구보다 투철했던 이명화 일병은 1950년 12월 22일 양양 부근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화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22판-7면-20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4-ㅊ-03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