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호(李明浩)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402224
  • 전몰일자 : 19510510

공훈사항

이명호 일병은 1931년 3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인해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8월경 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육본 직할부대에 배치되었다.
이명호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소백산맥 선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다. 국군은 계속적으로 축차적인 지연작전을 실시하여 1950년 8월부터 낙동강 선 방어작전에 돌입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막아내고 적을 격퇴함으로써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1950년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한 후, 북진을 계속해 한・중 국경선에 도달했다. 하지만 10월 25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밀려 38도선까지 철수하여 방어에 임하였으나, 중공군의 신정 공세에 또다시 밀려 37도선 일대까지 철수하여 공산군과 공방전을 전개했다. 이 일병은 이 과정에서 누구보다 용감하게 앞장서서 싸웠다.
한편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수많은 보충 인력이 소요되었다. 이에 국방부는 1950년 12월 21일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를 기간으로 하고 제2국민병역을 대상으로 후방예비부대 성격의 국민방위군을 창설했다. 그리고 이를 이끌 간부육성을 위해 방위사관학교를 대구에 함께 설치했다. 국민방위군은 청·장년을 후방의 안전한 지역으로 집단 철수시켜 예비전력 확보 및 장차 필요한 병력 보충원으로 활용한다는 목적하에 창설되었다. 1951년 4월 하순경 이 일병은 방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교육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대구에는 정부기관과 육군본부, 미 제8군사령부, 각종 지원부대 등이 밀집되어 있어 이들에 대한 공산군 정찰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습격, 파괴활동이 심했다. 이들은 때로는 신병훈련소와 방위사관학교를 급습하여 훈련병을 사살하고 정상적인 교육훈련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1951년 5월 10일 적 게릴라들이 방위사관학교를 습격했고 이때 이명호 일병은 적과 교전하다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호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24판-5면-16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85-ㅌ-10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