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호(李明鎬)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병
  • 군번 : 9382431
  • 전몰일자 : 19530618

공훈사항

이명호 이병은 1932년 4월 1일에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6·25전쟁 발발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지루한 휴전협상이 진행되던 1952년 12월 16일에 제주도에 위치한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1사단 제20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명호 이병이 전선에 투입될 무렵 1953년 초, 휴전회담이 여전히 중단된 상황에서 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쌍방은 1952년 말까지 계속된 치열한 고지쟁탈전 후 전선정비를 하면서 휴전회담의 최대 걸림돌인 포로문제의 조기타결을 목표로 하되 자신들의 입장 관철을 위한 영향력의 행사, 휴전과 관련하여 보다 양호한 방어선의 확보, 그리고 정치, 심리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전쟁의 종결 등 군사. 정치적 목적에서 새로운 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군사전략의 모색에 분분하였다.
적은 1953년 1월-2월에는 전력 증강과 진지공사에 주력하다가 겨울이 지나고 3월이 되자 작전에 양호한 기후조건을 이용하여 유엔군 전초진지에 대하여 제한된 규모이지만 집중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4월 20일부터 시작한 상병 포로교환이 계기가 되어 4월 26일 중단된 휴전협상의 본회담이 6개월 만에 재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월부터 하계공세, 즉 휴전 전 ‘최후의 공세’라 칭하는 대공세를 취하였다.
사단은 1953년 6월 10일에 방어진지를 제21사단에 인계하고, 화천 일대의 산양리, 하로곡, 동지화로 이동하여 제2군단의 예비가 되었다. 이는 이 지역에서 중공군의 심상찮은 공격 징후들이 많이 보였기 때문에 대응하는 조치였다.
이후 사단 장병들은 후방지역으로 침투한 적에 대해 주기적으로 탐색 및 소탕작전을 실시했다. 이 이병은 부대원들과 함께 6월 16일에 수색정찰 활동을 나갔다가 중공군 수색조를 발견하여 격멸했다. 그러던 중 이명호 이병은 적의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제15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6월 18일에 애석하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호 이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03판-3면-548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88-ㅂ-08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