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하(이명하)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22322
  • 전몰일자 : 19501009

공훈사항

이명하 일병은 경상북도 김천시 황금동 76번지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던, 1950년 8월 하순경 입대하여, 제주도에 위치한 육군 제5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육군직할 제26교육보충연대로 배치되었다. (*소속이 제25연대로 되어 있으나, 당시 제25연대는 해체되었으므로 제26교육보충연대로 조정)
한편, 개전 이래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병력 보충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병력 확보와 각 지역 방위 임무를 동시에 해결할 목적으로 1950년 7월 초순 각 도별로 편성관구사령부를 설치하고 신병 확보와 더불어 후방지역작전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7월 16일부로 각 편성관구사령부 예하에서 무기와 장비 보충이 없는 상태에서 신편(신병 모집) 중이던 연대들을 신병교육대로 개칭했다. 이에 따라 전남편성관구사령부 예하 제26교육보충연대가 제3교육대로 개칭되어 광주에서 대구로 이동하여 경북편성관구사령부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 이후 8월 14일에 육군본부 직할로서 대구에서 제1훈련소가 창설되었고, 8월 26일 제1훈련소에 제1·2·3·5·6·7·8·9교육대가 통합 편성되었다. 계속해서 1950년 8월 14일 부산에는 제2훈련소가 창설되었고, 8월 22일에 경남 구포에 제3훈련소가, 제주도 모슬포에 제5훈련소가 창설되면서 신병을 양성하여 부족한 병력을 보충했다.
이명하 일병이 부대에 조교로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국군과 유엔군의 주력이 북진작전을 한창 진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제3교육대는 제1훈련소로 편성되어 신병 양성에 전념했다. 이처럼 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대구 지역에 대한 북한군 정찰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습격, 파괴활동이 더욱 극심해졌다. 당시 대구에는 정부기관과 육군본부, 미 제8군사령부, 각종 지원부대 등이 밀집되어 있어 게릴라들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이 워낙 긴급했고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대구방위사령부는 신병교육대 교관 및 조교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게릴라들의 활동에 대응했다. 10월 9일 대구 시내에 적이 출몰했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이명하 일병과 기동타격대원들은 이들 소탕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전투에서 이명하 일병은 적 게릴라를 탐색하다가 은거해 있덩 적들의 기습사격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하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08판-3면-198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3-ㅍ-074)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