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춘(이명춘)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6219446
  • 전몰일자 : 19510101

공훈사항

이명춘 일병은 경상남도 마산시 회원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6・25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이 낙동강 선까지 남진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이 일병은 1950년 8월 중순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동 훈련소 조교로 배치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1일부로 낙동강 선으로 철수하여 최후의 방어에 임했다. 8월 중순 이후 전선이 왜관-수암산-유학산-군위-보현산을 잇는 대구 북방에 형성됨으로써 이에 호응하여 대구 지역에 대한 북한군 정찰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습격, 파괴활동이 더욱 극심해졌다. 당시 대구에는 정부기관과 육군본부, 미 제8군사령부, 각종 지원부대 등이 밀집되어 있어 게릴라들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이 워낙 긴급했고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대구방위사령부는 신병교육대 교관·조교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게릴라들의 활동에 대응했다. 이 일병은 신병훈련에 임하면서 때로는 기동타격대로 편성되어 적 게릴라 소탕작전에 투입되곤 했다.
9월 들어 북한군 총공세가 시작되면서 9월 4일경 전 전선에 걸쳐서 국군과 유엔군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경북 경주와 영천에서의 국군의 패퇴로 인해 미 제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미 제8군사령부 지휘부의 기간요원만 대구에 남기고 나머지 요원을 모두 부산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했고, 육군본부도 9월 5일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동했다. 이 무렵 이 일병은 제1훈련소에서 육군본부 경비대로 전속되어 육군본부 경비에 임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힘입어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한 후 계속 북진했다. 이에 따라 육군본부도 9월 23일 부산에서 다시 대구로 이동했다. 1951년 1월 1일 중공군 제3차 공세에 호응하여 적 게릴라들이 육군본부를 습격했고 이 일병은 이들을 맞아 용감하게 앞장서서 싸우다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춘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40면-21847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4-ㅈ-08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