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철(李命哲)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31849
  • 전몰일자 : 19500920

공훈사항

이명철 일병은 경상남도 양산군 물금면(現 양산시 물금읍)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이 소백산맥 선까지 남진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1950년 7월 중순경, 대구에 위치한 경북편성관구사령부에 현지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7교육대 조교요원으로 자충되었다.
한편 육군본부는 개전 이래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병력 보충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자, 7월 초순에 각 도별로 편성관구사령부를 설치하여 신병 확보와 더불어 후방지역작전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가 대구에서 창설되었고, 신병교육을 위해 7월 11일에 제25교육연대가 창설되었다.
이는 7월 17일에 경북편성관구사령부 제7교육대로 개칭되었고, 8월 1일에 육군중앙훈련소로 개칭되었다가, 8월 14일 국본 일반명령 제46호로 육군본부 직할로서 대구에 육군 제1훈련소, 부산에 육군 제2훈련소로 재창설되었다. 8월 26일 제1훈련소에 제1·2·3·5·6·7·8·9교육대가 편성되었다. 이들 신병훈련소가 창설되기 전에는 각 도의 편성관구사령부가 임시로 신병 모집과 교육을 했다.
이명철 일병이 제7교육대에 조교요원으로 남게 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으로 후퇴를 거듭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신병교육에 전념하면서 교육대 방호 임무도 병행했다. 이처럼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대구 지역에 대한 북한군 정찰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습격, 파괴활동이 더욱 극심해졌다. 당시 대구에는 육군본부와 美 제8군사령부, 각종 지원부대, 정부기관 등이 밀집되어 있어 정찰대들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이 워낙 긴급했고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제1훈련소는 교육 중인 신병과 교육대 조교 및 기간요원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북한군 정찰대에 대응해왔다. 9월 20일 육군본부 인근에 적이 출몰했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이명철 일병이 소속된 제7교육대 기동타격대원들은 적 게릴라 소탕작전에 투입되어 격멸하는데 성공했다. 이날 소탕작전에서 이명철 일병은 부대원과 함께 교전 중 적의 기습사격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철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12판-4면-26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2-ㄹ-065)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