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천(李明天)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병
  • 군번 : 0166744
  • 전몰일자 : 19510306

공훈사항

이명천 이병은 1930년 9월 17일 경기도 김포군 향촌면에서 출생했다. 6·25전쟁 발발 이후 그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조국이 다시 위기에 처하자, 그는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이 이병은 1950년 12월 8일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 분연히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5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이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후의 전황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37도선으로 철수 중이었고, 제7사단은 순천-승호리-시변리-춘천으로 지연전을 펼치며 철수하여 12월 15일 춘천 동북방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 중인 상황이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시작했고, 연대는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이 이병과 연대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주진지가 돌파됨에 따라 상급부대 계획에 따라 자은리를 거쳐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적의 압박 가중됨에 따라 연대는 또다시 철수하여 1951년 1월 8일 영월 북서방의 석항리 일대에 배치되었다.
이 무렵 유엔군 후방지역에 제2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중동부전선으로 침투한 북한군 제2군단은 영월을 거점으로 응봉산, 만경대산, 마대산 등지에 병력을 전개하고 영주-봉화-춘양 방면으로의 침투를 시도했다. 이에 국군 제3군단은 제7사단을 군단의 좌측부대로 후천-완택산(△916)-두평(영월 동쪽 4km) 간에 배치했다. 제3군단은 제3사단이 남대리 전투에서 승리하자, 제7사단에 제3사단 제23연대를 배속하여 곧바로 영월탈환작전을 전개했다.
사단은 1월 19일 공격을 개시하여 만경대산을 점령하고, 20일 영월 탈환의 최후 교두보였던 응봉산마저 점령했다. 사단은 1월 24일 미 제7사단과 연합작전으로 영월 시가지 탈환작전에 나서서 백병전을 전개하는 치열한 전투 끝에 당일 영월을 점령한 후, 퇴각하는 적을 격멸했다.
2월 11일 개시된 중공군 제4차 공세(2월 공세) 때, 연대는 북한군 제2군단의 집중 공격을 받고 평창 일대를 내주고 후방으로 후퇴했다. 적은 계속해서 영월을 점령하려고 기도했으나, 연대는 17~18일 양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유엔군의 킬러작전(2. 21.~3. 6.) 때, 연대는 평창-창동리 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평창군 백석산 일대까지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이 이병은 앞장서서 진격하다 3월 6일 백석산 일대에서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천 이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40면-21845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2-ㅁ-00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