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재(李明宰)

  • 군별 : 공군
  • 계급 : 일등상사
  • 군번 : 1203565
  • 전몰일자 : 19500703

공훈사항

이명재 일등상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준비로 정치 및 사회적으로는 혼란스럽던 1947년 5월 중순, 충남 대전의 육군 제2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예하 대대로 배치되었다. 이후 그는 1948년 9월 중순에 육군 군기학교로 입교하여 소정의 교육과정을 수료한 후 육군 헌병이 되었다.
공군 헌병대가 1950년 1월 15일에 창설되었고, 4월 중순에 육군 헌병요원 28명이 전입되었다. 이때 이명재 일등상사는 육군에서 공군 헌병대로 전속되었다. 당시 헌병의 임무는 공군 내의 군기와 풍기의 단속 유지는 물론 각 비행장의 치안에 관한 책임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공군은 1949년 10월 1일부로 육군으로부터 독립되었고, 이에 육군 항공사령부는 해체되고 공군본부가 탄생하였다. 공군본부는 예하 부대로 1개 비행단, 공군사관학교. 항공기지사령부, 여자항공대, 보급창, 공군병원이 있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에 전면적인 기습남침을 감행하자, 공군은 여의도 비행단에 작전지휘소를 설치하고, 김포지구에 경비사령부를 창설하여 공군 작전의 지속성을 보장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북한 공군은 항공기 220대와 2,800여 명의 병력을 보유한 반면, 대한민국 공군은 경비행기 22대와 병력 1,800여 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공군본부는 예하 비행단을 동원하여 6월 25일∼27일까지 육군의 서울 방어를 지원하기 위해 문산, 의정부, 포천 지역에서 정찰비행 및 북한군에 대한 폭격 작전을 감행하였다.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공군본부는 6월 27일에 수원으로 이동하였다. 공군 비행단은 7월 2일 미 공군으로부터 F-51D 전투기 10대를 도입하여 본격적인 항공작전을 펼치게 되었고, 전황이 점점 더 불리하자 7월 6일에 대구로 이동하였다. 이런 가운데 이명재 일등상사는 헌병하사관으로 부대가 이동할 때에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7월 3일에 비행단은 먼저 떠나고, 수원비행장에 남아 보급 및 정비부대들이 지상으로 철수할 때에 경비 임무를 수행하다가 북한군 야크기의 공격을 받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재 일등상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17묘역-5판-13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91-ㅅ-04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