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재(李明宰)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병
  • 군번 : 0232063
  • 전몰일자 : 19510213

공훈사항

이명재 이병은 서울특별시 성동구 마장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후 중공군의 참전으로 대한민국이 다시 위기에 처하자 1950년 12월 30일 입대하여, 부산에 위치한 육군 제2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5사단 수색대로 배치되었다. 당시 수색대는 적진에 침투하여 적정을 수집하여 보고하거나 지휘소를 습격하고 탄약고 등 주요시설을 폭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명재 이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1·4후퇴로 37도 선의 평택-안성선까지 물러난 국군과 유엔군이 전력을 회복 후 총반격을 개시하면서 23만 명의 대병력으로 서울재탈환 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제5사단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를 받고 후방을 차단당하여 적들에게 포위가 되었으나, 포위망을 돌파하여 가평을 거쳐 문막 동쪽으로 이동하여 방어 배치했다. 그러나 북한군 제10사단이 제천-단양-안동까지 침투하자, 사단은 문막 일대에서 제천-영월으로 이동하여 방어 배치를 전환했다.
사단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를 저지한 다음 1951년 2월 5일부로 홍천 포위 공격을 개시했다. 좌측방 36연대가 강력한 적의 저항으로 진출이 곤란하자 2월 7일 제36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예비인 제35연대를 좌측 전방에 투입함으로써 3개 연대 병진대형으로 공격을 재개했다. 이명재 이병이 소속된 사단은 2월 9일 적 주력이 4일 동안 완강하게 저항하던 방어거점인 강원도 횡성 일대 317고지-412고지-247고지를 돌파하고 섬강 남쪽으로 진출했다.
이어서 사단은 북한군 제6사단의 지휘소가 위치한 횡성군 갑천면 포동리를 점령했으며, 이때 적 지휘소를 수색하여 다수의 문서와 탄약 25상자를 노획했다. 이후 홍천 우측방의 목표 점령을 앞둔 사단은 2월 10일에 대규모 중공군의 기동을 확인하고 야간 방어로 전환했다. 마침내 2월 12일 아침 사단은 중공군의 집중적인 공격(일명 2월 공세)을 받고 방어진지에서 철수를 개시하여 점령하여야 할 원주-평창선보다 남쪽으로 계속 철수했다. 계속해서 사단은 제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영월군 주천리 일대에 新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중공군은 2월 14일 이후부터 국지적인 탐색전만 전개하며 2월 16일까지 재공격을 실시하지 않았다. 이명재 이병은 1951년 2월 13일 강원도 영월 일대에서 분대원과 함께 적정 탐색을 위해 수색정찰 중 적 포격에 맞아 안타깝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재 이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06판-6면-03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32-ㄷ-036)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