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위(이명위)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14161
  • 전몰일자 : 19501202

공훈사항

이명위 일병은 1927년 3월 16일 부산시 서구 충무동에서 출생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국군이 낙동강 선으로 철수하자 그는 조국을 지키고자 분연히 일어섰다. 이 일병은 1950년 8월 16일 카투사(KATUSA) 요원으로 선발되어 미 제24사단에 배치되었다. 그는 첩보수집, 편의대 활동으로 사단 작전에 기여하다 10월 초순 제7사단으로 전속되어 본부중대에 배치되었다.
이 일병이 제7사단으로 전속될 무렵 사단은 추격작전 중이었다. 사단은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문경-수안보-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7일 서울 청량리에 도착했다.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사단은 김화-평강을 거쳐 17일 곡산에 도달하여 잔적소탕작전을 했다. 20일 평양이 탈환되자 사단은 육군 예비로 전환되어 29일까지 평양과 그 북방 일대의 잔적소탕 임무를 수행했다. 10월 29일 제2군단으로 배속 전환된 사단은 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로 집결 후, 다음 날 개천 동쪽의 비호산 일대에 배치되었다.
11월 3일 사단은 중공군 제112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사단 장병들은 7일까지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하고 비호산을 지켜냈다. 사단이 비호산을 확보함으로써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중공군과의 대결에서 처음으로 승리함으로써 중공군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떨쳐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1월 14일 사단은 덕천으로 진격했고,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11월 22일 묘향산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사단은 묘향산 남방에서 중공군 제38·42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사단 지휘소가 습격당해 지휘통제 능력을 상실한 채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일병은 지휘소를 끝까지 지키며 용감히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12월 2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위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3판-40면-21838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7-ㅁ-08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