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우(李明雨)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608641
  • 전몰일자 : 19510912

공훈사항

이명우 일병은 1930년 9월 25일에 강원도 홍천군 서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을 진행 중이던 1951년 4월 15일 입대하여 제주도에 위치한 육군 제1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 후 제5사단 수색대에 배치되었다. 당시 수색대는 적진에 침투하여 적정을 수집하여 보고하거나 지휘소 습격 및 탄약고 등 주요시설을 폭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명우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캔자스(Kansas)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과 그 북방에서 중공군 및 북한군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美 제10군단에 배속된 제5사단은 인제 부근 전투에서 적을 격퇴하며 장평-봉화봉을 잇는 캔자스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사단은 적의 4월 공세에 밀려 다시 소양강 남단으로 철수했다.
중공군 5월 공세 때 사단은 중공군 제12군 및 제27군 예하 3개 사단의 집중 포위공격 속에서도 풍암리까지 조직적으로 격전과 철수를 반복하면서 적의 종심기동을 저지했다. 5월 하순 공세로 전환한 美 제10군단은 新캔자스선(화천저수지-해안분지-향로봉-거진)을 확보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에 사단은 군단의 우측 전방 부대로서 6월 4일 한계리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격전 끝에 1951년 6월 17일 목표인 서화리 일대의 고지들을 점령했다.
이명우 일병이 소속된 사단은 원통 북방 서화리 일대의 新캔자스선에서 적과 대치 중에 있다가, 8월 초순 군단 예비로 전환되어 현리 일대에서 부대정비와 교육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 무렵 美 제10군단은 남으로 만곡부를 이루는 전선을 북으로 밀어 올리기 위해 강원도 양구 일대 해안분지(펀치볼) 확보작전을 실시했다.
이에 따라 사단은 8월 31일 가칠봉 북쪽의 1,211고지와 서희령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하여 9월 3일 서희령을 탈취했다. 그 후 사단은 미 제38연대로부터 가칠봉을 인수받아 최초 제27연대를 주력으로 1,211고지를 9월 9일 최초 점령했다. 그러나 사단은 적 반돌격으로 가칠봉으로 철수하여 전투력 복원에 전념했다.
계속해서 10월 1일에 사단 총공격으로 2차 점령 및 철수, 다시 10월 8일에 제27연대가 공격하여 3차 점령하였으나 또다시 적의 역습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이명우 일병은 양구 북쪽 적진에 침투하여 분대원과 함께 적 탄약고를 습격 중 9월 12일 적 경계병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우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5판-1면-20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33-ㅊ-074)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