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우(李明雨)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26573
  • 전몰일자 : 19500920

공훈사항

이명우 일병은 경상북도 경주군 광명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에 수립되었음에도 정치 및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1949년 10월 중순, 서울 용산의 제19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예하 대대로 배치되었다. 이후 연대는 1950년 4월 19일에 원주로 이동하여 제6사단에 예속되었고, 사단 예비로서 교육훈련과 부대정비에 주력했다.
북한군이 6월 25일 새벽 기습남침을 감행했을 때, 이명우 일병이 소속된 제19연대 본대는 원주에서 기차로 청량리를 거쳐 6월 26일 새벽 5시에 춘천에 도착했다. 이후 연대는 춘천 방면의 제7연대와 홍천 방면의 제2연대를 증원하여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시킨 후 6월 30일 오후에 원주로 철수했다. 그리고 7월 한 달 동안 충주-문경(조령)-함창 축선에서 북한군 제1, 제13사단을 맞아 지연전을 실시하고, 8월 1일에 낙동강을 건너 용기동~양곡동을 잇는 능선 일대를 점령했고, 8월 6일에 선돌주막 남쪽의 새로운 방어진지로 철수했다.
이명우 일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8월 13일 다시 군위, 의흥을 거쳐 매봉산과 산운동 일대로 철수해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북한군 제1사단은 8월 15일부터 전차로 증강하여 제19연대 방어정면을 공격했다. 연대 장병들은 적의 공격을 끝까지 격퇴했으나, 전투력의 열세로 8월 21일 야간에 민부대에 방어진지를 인계하고 사단 예비가 되었다. 그런데 북한군이 8월 27일에 화산 및 조림산을 무혈점령하여 신녕 지역이 위험에 처하자, 이날 연대는 신녕 지역으로 신속히 투입되었고,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조림산 탈환을 위해 공격했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탈환하지 못했다.
북한군은 9월 1일 야간에 전차 2대를 앞세운 보전협동부대로 공격했고, 연대는 9월 4일까지 계속된 전투로 저지했다. 이때 제19연대는 9월 5일에 상급부대 명령에 의해 제8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영천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이곳에서 연대는 금호강 북쪽에서 영천역과 완산동 방향으로 적을 협공하여 퇴로를 차단해 영천의 위기를 벗어나도록 지원하고, 9월 12일에 사단으로 복귀하여 반격준비를 했다.
유엔군은 9월 16일 오전 9시를 기해 낙동강 전 전선에서 일제히 반격했다. 최초 공격 4일간은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전만 전개했다. 이명우 일병이 소속된 제19연대는 9월 20일에 적의 측방을 공격했고, 적은 완강히 저항했으나 퇴각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우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0판-2면-19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0-ㅂ-06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