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용(李明龍)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96866
  • 전몰일자 : 19501002

공훈사항

이명용 일병은 평안북도 희천군 우가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을 진행 중이던 1951년 3월 초순경 입대하여, 제주도에 위치한 육군 제1훈련소에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9사단 제30포병대대로 배치되었다. 제30포병대대는 1950년 9월 10일 육본직할로 창설되어 1951년 1월 26일부로 제9사단에 예속된 부대이었다.
이명용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캔자스(Kansas)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과 그 북방에서 중공군 및 북한군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제9사단은 강원도 정선 일대에서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4월 들어 유엔군은 38도선 상의 유리한 방어지역인 캔자스선을 확보하기 공세작전을 개시했고, 사단은 4월 중순 하진부리 일대까지 진격했다.
제9사단은 4월 25일부로 제3군단에 배속되어 강원 인제 동남쪽의 한석산, 가리봉 일대를 점령했다. 중공군이 5월 16일 현리 일대의 국군 정면에 전투력을 집중하여 5월 공세를 개시했다. 군단의 유일한 보급로 상의 오마치고개가 중공군에게 선점된 가운데 사단은 현리에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험준한 방태산을 넘어 광원리-속사리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이명용 일병은 적진을 향해 포격을 하다가 적의 대포병사격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1951년 7월경에 건강이 회복되어 독립포병 제109대대로 전속되었다. 同 대대는 1951년 4월 29일 육본 직할로 창설되어 경남 진해의 포병학교에서 신병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명용 일병은 계속적으로 확장되는 포병 장병의 교육에 불철주야 만전을 기하며 단시일 내에 장병들을 양성하는 데 전념했다.
한편, 전선이 38도선 일대로 남하함에 따라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북한군 패잔병과 지방 공산세력들의 후방교란 활동이 더욱 극심해졌다. 포병학교는 교육훈련에 전념하면서도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이들 게릴라들이 학교 주변에 출현하면 출동하여 대응했다.
1951년 10월 2일 학교 인근에 게릴라들이 나타나자, 편성되어 있던 기동타격대는 출동하여 적을 격멸했다. 이 전투에서 이명용 일병은 탐색조로서 조원들과 함께 적을 탐색하다가 적의 기습을 받고 교전 중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용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83-ㅋ-009)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