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용(이명용)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7201041
  • 전몰일자 : 19510725

공훈사항

이명용 일병은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인해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9월 중순경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군단사령부에 배치되었다.
이명용 일병이 배치된 군단은 9월 하순부터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기계-강릉을 도착할 거쳐 10월 1일 예하 제3사단을 선봉으로 38도선을 최초로 돌파하고 미 제10군단이 도착할 때까지 원산항을 확보하기 위하여 안변, 용포리, 용탄리 및 용탄강 입구를 주저항선으로 하고 영흥을 확보함으로써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문천, 영흥, 정평, 함흥 및 파춘장, 흥남 축선을 따라 진격하여 북한군을 섬멸했다. 11월 27일에는 수도사단이 청진을, 11월 30일에는 제3사단이 압록강 연안의 혜산진을 점령했다.
중동부전선의 험준한 산악지역을 방어한 군단은 1951년 1월 1일 홍천-원포리 방향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후 7일에는 홍천에서 영월로 이동 중 적과 조우하여 격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명용 일병과 장병들은 군단의 방어선인 두평-후천-정선-송계리 전방에서 적의 공격이 감소하자 군단 후방지역의 위협을 제거하고 후속부대의 증원을 차단할 목적으로 18일 남대리 부근으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에 북한군은 산속으로 잠적한 후 야음을 이용하여 기습공격으로 저항하였으나 포병화력과 항공지원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분산되어 산중으로 도주하였다. 그 후 이 일병과 군단 장병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수하여 횡성 전투에서 공방전을 전개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 제1군단은 중공군의 5월 공세를 맞아 설악산-속초 선에서 분전하였으나 19일 육본명령에 의거 전선을 조정하기 위해 오대산-두노봉-남애리를 연하는 와코(Waco)선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이때 군단은 적을 저지하기 위하여 동해안 진역의 유천리-횡계리에 배치되었다.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언제나 선두에 서서 싸우는 용맹을 발휘하였다. 생사기로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명용 일병은 1951년 7월 25일 봉화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용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유해(24묘역-5판-830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22-ㄲ-02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