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명영(李命榮)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235307
  • 전몰일자 : 19510822

공훈사항

이명영 일병은 1922년 11월 11일에 경기도 인천시 남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로 38도선에 편성한 방어진지에서 철수할 때인 1951년 1월 2일,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2사단 제32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명영 일병이 부대로 배치되었을 때인 2월 말, 제2사단은 2월 13일 안동 일대로 이동하여 일월산과 보현산 일대에서 후방교란을 일삼던 북한군 패잔병에 대한 소탕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후 사단은 후방지역작전을 완수하고, 4월 28일에 청평으로 이동하여 미 제9군단에 배속되었다. 당시 군단은 중공군의 4월 공세를 저지하고 38도선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5월 10일을 전후하여 중공군의 활동이 현저히 증가되는 공세징후들이 포착되어 방어로 전환했다. 이후 중공군의 공세가 5월 16일부터 시작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북방-용문산-대관령-강릉을 연하는 선에서 저지시키고 20일을 기해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명영 일병이 소속된 사단은 5월 24일부터 본격적인 반격작전을 감행하여 청평-가평을 연결하는 도로의 감제고지에 배치된 적들을 제압하며 진격했다. 그리고 6월 12일에는 육단리-적근산을 잇는 캔자스선까지 진출했다. 이후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명영 일병이 소속된 제2사단은 8월 2일에 공세적인 행동으로서 방어지역 전방의 감제고지인 745고지를 공격했다. 제32연대는 사단의 조공으로서 강력한 항공 및 포병화력 지원을 받아 보전 협동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탈취했다. 이에 중공군은 그날 야간에 반격을 감행하여 피아간에 공방전은 8월 8일까지 계속되었으나, 아군이 745고지를 탈취하는 데 실패했다.
전선은 다시 소강상태가 계속되었고, 장병들은 방어진지 보강과 수색작전에 집중했다. 이명영 일병이 소속된 소대는 8월 22일에 방어지역 전방으로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침투조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명영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을지무공훈장(훈기번호 403 국)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48묘역-4판-3187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19-ㄷ-05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